비밀 품고 있는 영화의 오아시스 같은 배우들
고두심 그리고 박근형
비밀을 품고 있는 영화들이 있다. 소재나 주제 의식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민감할 때 ‘특별한 비밀’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관람하지 않은 사람은 전혀 다른 영화로 오해하고 말, 본 사람들은 깊은 아픔에 직면하게 되는 영화 두 편이 있다. 영화 ‘빛나는 순간’(감독 소준문, 제작 명필름·웬에버스튜디오, 배급 명필름·씨네필운, 2021)과 ‘동백’(감독 신준영, 제작 해오름ENT, 배급 시네마 뉴원, 2021)이다.
‘빛나는 순간’은 배우 고두심과 지현우의 33세 차를 극복한 멜로라고 알려졌지만, 막상 보면 제주 4·3사건 양민 학살이 도민과 우리 역사에 남긴 상처를 보듬고 한 판 살풀이를 올리는 작품이다. 후일 집집마다 한날한시에, 연일 곡소리 나는 제사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기에 앞서 허망하게 죽어간 원혼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배우 고두심의 빙의 연기와 눈물로 달랜다.
‘동백’은 바로 그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러 가는 군인 중 2천여 명이 위헌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인 명령을 거부하며 전남 여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 오르지 않으며 벌어진 참상, 시간이 흘러도 연좌제의 이름으로 피해가 대물림된 역사에 주목한다. 한 나라 백성을 죽이지 못하겠다고 해서 ‘빨갱이’가 된 군인, 어린 나이에 징집돼 배고픈 게 먼저인 그들에게 밥을 주고 쉴 곳을 내주었다고 ‘빨갱이’가 된 국밥집 주인, 국밥집 아들이라는 이유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도 무효 처리되어 다시 국밥집 주인이 되어야 했던 아들의 이야기다.
국밥집 아들 순철(박근형 분)은 밥을 얻어먹은 군인(양준 분)이 밥을 준 당사자로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고, 아비가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고, 연좌제에 얽혀 너른 세상으로 나가는 날개가 꺾였다. 그래도 어머니 모시고 열심히 사골을 고아 국밥을 말아 팔았고, 제 아버지처럼 배고프다는 이를 내치지 않고 대접하며 살았다.
착하게만 살았건만, 시위 진압대로 배정받아 군에 갔던 아들 남식(정선일 분)은 다리에 장애를 안고 돌아오고, 국밥집 아들의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짐’이 되어 얹혀사는 마음으로 위축돼 살고 있다. 남식의 아들, 국밥집 아들의 아들의 아들 귀태(서준영 분)는 락이 좋고 음악이 좋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 모르는 ‘철없는’ 장손으로 취급될 뿐이다.
영화 ‘동백’은 이러한 속내를 숨기고, ‘음식 장사는 맛으로 승부 보는 것’이라며 아들 남식이 서비스로 대접한 음식값마저 받으러 쫓아가는 고집불통의 노인네 1대 순철과 융통성 없는 아버지로 인해 떨어지는 손님을 모으고 사업의 재기를 노리는 2·3대 아들 부자의 대결로 출발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음식 맛에 반한 대형 투자사에서 프렌차이즈 계약을 제안해 오고, 문 닫기 일보 직전의 국밥집은 살길은 기본에 탄탄대로 성공을 눈앞에 두게 되는데.
여기서 ‘동백’은 우리에게 어려운 질문을 낸다. 해마다 10억씩 투자해 주겠다는 대형 투자사 회장(신복숙 분)은 사실 밥을 얻어먹고도 순철의 아버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죽음에 이르게 한 군인의 딸이었다. 소녀일 때 아버지를 따라 국밥집에 와서 단지 손님처럼 밥을 먹고 간 적이 있고, 서울로 도망해 신분을 숨기고 산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자, 여러분이라면 돈으로 전하는 이 사과를 받아들일 것인가. 돈으로나마, 뒤늦게나마 사과받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게다가 폐업 직전의 위기 상황인데, 언제까지 연좌제의 악연 속에서 가난하게만 살아야 하나. 남식과 그의 아내 순자(김보미 분), 아들 귀태의 생각이다.
하지만 순철은 자신이 할아버지가 됐어도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내 아비를 죽게 하고 어머니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자의 돈을 받을 수 없다. 동정하듯 던지는 돈은 사과가 아니다. 순철이 우리 역사와 세상으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은 단지, 배고픈 이에게 국밥을 내준 네 아버지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외면당한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뿐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돈 따위가 아니다.
영화에는 기막힌 장면이 나온다. 남식 부부와 귀태 가족은 투자사 회장에게 고개 숙여 사과한다. 모든 진실을 안 순철이 회장에게 한을 토로하는 과정에서 이를 말리는 회장의 손녀(윤서연 분)가 다쳤다. 이를 두고, 남식네 세 식구는 평생 마음의 죄를 안고 살아가겠다며 몸을 숙여 사죄한다. 내 집안 어른이 하신 일이지만, 한 가족으로서 사과한다.
그런데, 회장은 순철에게 끝내 사과하지 않는다. 남식네의 사과를 받고 차를 돌려 구치소로 찾아갔으면서도 생전의 아버지가 사과하고 싶어 했다는 뜻만 전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 우리도 “피해자”라며 그런 시대였다고 엄혹했던 시절로 탓을 돌린다. 내 나라 백성을 죽이지 않으려 한다고 빨갱이가 되고, 그런 자에게 밥을 줬다고 빨갱이가 되고, 밥을 준 자의 아들이라고 다시 빨갱이로 몰렸던 시대. 신분을 숨긴 자는 부자가 되었고, 가족사를 감추지 못한 자는 가난의 대물림 속에 사는 오늘.
틀린 말이 아니라 해도, 부유층이 된 자의 뻣뻣한 고개는 씁쓸하다. 본인의 손녀가 다친 것과 순철 부자가 겪어야 했던 죽음과 고역의 세월을 ‘등가’로 놓고, 네가 나를 용서할 수 없듯이 나도 너를 용서할 수 없다며 언제 그런 날이 오겠냐고 눙치는 말은 역사와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단지 사과는 이 정도면 됐다는 식, 본인들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물론 어느 이의 눈에는 가해자라고만 할 수 없음에도 금전으로 배상하려 했던 있는 자의 여유에 더욱 공감이 가고, 순철의 꼿꼿한 자존심이 없는 자의 자격지심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무서운 면모다.
두 영화는 ‘빛나는 순간’ ‘동백’ 순으로 같은 해 6월과 10월에 개봉했고, 관객 수 1.5만 명과 1.9만 명으로 흥행의 그늘에 서야 했다. 한 영화는 웰메이드로 완성됐고, 다른 영화는 부족한 제작비 속에 성긴 매무새를 지녔으나 흥행 성적은 대동소이하다.
어차피 결과가 이럴 거라면 주제 의식을 전면에 드러내는 게 좋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극영화는 창작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장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영화들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숨기고 있는 보물이 있는데, 그것을 많은 관객이 아직 발견하기 전이라는 것이다.
특히, 배우 고두심의 아름다운 연기는 아시안필름페스티벌 여우주연상 등으로 칭찬받은 바 있으나, 혼신으로 황순철을 연기한 배우 박근형의 연기가 제대로 칭송받지 못한 점이 아쉽다. 박근형은 캐릭터 연기만 잘한 게 아니라 작품을 이끌었다. ‘동백’의 성긴 완성도를 메우고 의미 있는 주제를 구체적 아픔으로 관객에게 전하는 힘이 그에게 있다. 그의 연기는 웨이브, 왓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연 배우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음에도 가장 현재성 강한 연기를 펼친다. 오래 묵은 느낌의 고전적 연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 연기가 돋보인다. 더불어, 시간으로 쌓아온 연기 경험과 경력이 얼마나 빛나는 순간을 만들 수 있는지 눈앞에 확인시킨다.
단지 회장님 전문 배우로 기억되는 건 어불성설이다. 키 큰 알파치노 같은 외모에, 나이 들어도 에너지 넘치는 리암 니슨 같은 활력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우수에 찬 감성을 지닌 박근형. 아니 그냥 ‘배우 박근형’이면 충분한 그는 오늘도 무대에 오른다. 오는 3월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관객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