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극장으로㉔] 서울 성북구 여행자극장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10년의 세월이 묻은, 여행자극장
서울 성북구의 한적한 골목, 오래된 건물의 귀퉁이에 녹이 묻어난 철문이 눈에 띈다. 한 평 남짓한 크기의 문 뒤에는 내년이면 10주년을 맞는 ‘여행자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거친 시멘트 바닥과 벽, 숨김없이 드러난 구조물이 관객을 맞는다. 칠이 벗겨진 계단과 검은 커튼은 이곳이 겪어온 시간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흔한 극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곳은 연극인들 사이에서 가장 자유롭고 도전적인 무대 중 하나로 통한다.
처음 이 공간은 극단 여행자의 연습실로 시작됐다. 연습실이라고 하기엔 사무실과 의상실까지 갖춘, 매우 넓은 공간이다. 활용도는 높지만 넓은 공간은 오히려 극단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극단이 사용하지 않을 때, 비어있는 공간을 빌려주려 했지만 비싼 대관료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당시엔 모두가 놀랄 만큼 큰 공간이었어요. 월세가 비싸다 보니 대관료도 비쌌죠. 국립극단과 같은 국공립 공연팀이나, 규모가 큰 뮤지컬 팀이 주로 대관했고, 민간 단체에선 사실상 대관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이럴 바에야 우리가 직접 공연을 올리자라는 결심으로 이어졌어요.”
변화의 시작은 과감했다. 2016년 극단 여행자의 대표였던 양정웅 연출은 김 대표에게 “이 공간을 다 허물자”고 제안했다. 김 대표 역시 양정웅 연출과 해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후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터라, 이 변화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양 연출과 단원들이 사비를 털어 내부를 철거했더니 지금의 시멘트 구조가 그대로 드러났죠. 휑한 콘트리트 공간이 극장의 첫 시작이었어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콘셉트로 삼게 됐습니다. 사실 (공연장으로 수리할 만한) 돈이 진짜 없기도 했고요(웃음).”
그렇게 극장은 탄생했다. 해외 투어를 다니며 길 위에서도, 창고에서도 공연을 올렸던 경험은 두려움을 없애 줬다. 단원들이 직접 시멘트 벽을 칠하고, 박스를 세워 무대를 만들었고, 초기 장비라고는 기존 철 구조물에 매단 조명 6~7개가 전부였다. ‘부족함’이 오히려 여행자극장만의 독특한 미학과 정체성을 만든 첫걸음이었다.
┃여행자극장의 철학,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움’
여행자극장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자유로움’이다. 김 대표는 이 철학은 극장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집스럽게 ‘블랙박스 씨어터’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행자극장은 무대, 객석, 백스테이지의 경계가 없다. 공연장과 분장실의 구분은 커튼 하나가 전부다. 그러다 보니 공연장 안에 냉장고, 정수기, 화장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극단은 이를 단점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공연의 일부인 소품으로 활용한다.
“틀에 박힌 공연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공간을 나누기 시작하면 활용도가 떨어지고, 이런 구조가 더 자유로운 발상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철학은 운영 방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연장 대관은 장르를 불문하고 ‘선착순’으로 진행된다. 또 연극, 뮤지컬, 전시, 음악회는 물론, 최근에는 극단 출신 유튜버가 ‘엉망진창 쇼’라는 이름으로 4일간 공간을 사용하기도 했다.
“제약을 둘수록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는 생각으로, 여행자극장은 모든 창작자에게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어요. 심지어 배우들의 컨디션을 위해 작품에 따라 월, 화, 수를 통째로 쉬기도 하고요. 우리 극장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죠.”
지난 30년간 극단 여행자가 쌓아온, 그리고 10년간 여행자극장에서 만개한 레퍼토리는 이곳의 가장 큰 자산이다. ‘한여름 밤의 꿈’ ‘베로나의 두 신사’ ‘시나로 드 베르주라크’ 등 내로라하는 작품들이 여행자극장에서 만들어졌다.
“아마 우리 페러토리만으로도 1년은 족히 채울 수 있을 겁니다. 극장이라는 하드웨어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그 중에서도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여행자극장의 성향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에요. 공연장 자체가 소품이 되는 식이었죠. 무대를 중앙에 두고 360도로 관객이 둘러싸는 형태로 기획했어요. 계단 아래 작은 창문으로 시라노가 등장하고,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극장 밖 도로를 뛰어 다른 쪽 문으로 다시 들어오는 등 공간의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어요. 극단 여행자의 상임연출인 이대웅 연출은 대극장에 올려보고 싶다고도 했고, 다른 곳에서 공연해달라는 제안도 있지만 여행자극장에서만 낼 수 있는 특유의 ‘맛’이 있어요.”
‘없음’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작업도 계속됐다. 이대웅 연출의 ‘정글북’은 단돈 100만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고, 신진 연출가들의 등용문인 ‘극장전’을 통해 선보이는 작품은 250만원으로 제작했다.
“외부에서는 극장을 가졌으니 풍족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우아한 백조가 물밑에서 필사적으로 발을 구르는 오리와 같아요. 그런데 부족한 제작 환경은 오히려 연출가들의 독창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제작비가 부족하니까 연출이 매표소에서 일하고 배우들은 무대나 포스터 등을 직접 만들죠. 한국 연극계에선 ‘배우’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닌 것 같아요.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겸할 수밖에 없는데 그 시간에 무대에서 경험을 쌓도록 하고 있어요. 돈이 없어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은 이 경험을 배우들의 또 다른 ‘경력’으로 바꿔줬어요. 실제 무대 제작을 하던 단원이 무대제작소를 차리기도 했으니까요.”
┃모두가 함께 만든 10년의 역사
지금은 연중 대관이 꽉 찰 정도로 사랑받는 극장이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연 수익이 생길 때마다 전압을 올리고, 조명 한 개, 음향 기기 한 개를 사들이며 공간을 채워나갔다. 물이 새 바가지를 든 채로 공연하거나, 정전으로 공연이 취소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극장은 단단해졌다.
가장 큰 위기는 2년 전 찾아왔다.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힌 김 대표는 양정웅, 정해균 등 창립 멤버들에게 극장을 접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예상 외로, 양 연출은 “정 못하겠으면 하지 마라. 이 극장이 누군가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학전 소극장이 문을 닫는 것을 보며 ‘영원한 건 없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어른이다’라는 말도 해줬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역설적으로 극장을 계속 운영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잘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겐 그 ‘생산적인 일’이 이 극장이었던 거죠.”
여행자극장은 이제 새로운 역할을 꿈꾼다. 내부적으로 진행하던 ‘극장전’을 외부의 신진 연출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극장전(田)이라는 이름처럼, 여행자극장이라는 밭에서 마음껏 씨앗을 심고 수확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의미다. 김 대표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연출가들이 너무 많다. 여행자극장이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기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극단 창단 30주년, 극장 개관 10주년을 맞는 여행자극장은 ‘홈커밍데이’도 기획 중에 있다.
“이 극장은 제 것이 아니라 단원들, 관객들 그리고 이곳을 스쳐 간 모든 이들의 것입니다. 지난 세월 받은 도움을 이제는 나누고 싶어요. 꿈꾸는 이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여행자극장이 나아갈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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