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서 '핵포기 없다' 입지확대 시도한 北
李·트럼프 언급없어…수위조절 흥미롭기도
정동영 "북, 美타격 가능…인정할건 해야"
ICBM 평가 확인된 바 없어 섣부르단 지적도
북한이 7년 만에 유엔총회에 고위급 대표를 파견해 '핵 포기 불가론'을 천명하며 반(反)서방 진영의 일원임을 과시했다.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며 다자외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데 이어,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29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 마지막날에 미국 뉴욕 유엔본부 유엔총회장에 10번째 연설자로 연단에 올라 "우리에게 비핵화를 하라는 것은 곧 주권을 포기하고 생존권을 포기하며 헌법을 어기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우리는 핵을 절대로 내려놓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이 입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에서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 중 고위급 대표가 연설한 것은 2018년 이후 7년 만이다. 북한은 지난 2014∼2015년엔 리수용 당시 외무상이, 2016∼2018년 리용호 당시 외무상이 유엔총회에 참석한 바 있다. '하노이 노딜' 이후인 2019년부터 작년까지는 별도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고 김성 주유엔 북한대사가 대신 연설해 왔다. 사실상 고립됐던 북한이 다시금 국제 무대 복귀를 노리는 셈이다.
다만 '핵보유국 지위'를 전면에 내세웠던 지난해 연설과 달리, 이번에는 핵 보유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핵무기 자체가 체제 보장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되, 국제사회와의 대결 구도를 완화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김 부상은 "지금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세상을 목견하고 있다"며 서방 패권국의 전횡으로 유엔 헌장과 국제 규범이 침해받고 있다는 주장을 부각하는 데 긴 시간을 할애했다. 이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인 관세 전쟁으로 세계 경제 전반이 침체와 불안정의 늪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 전쟁'을 콕 집어 비판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이야말로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대표적 사례라는 점은 철저히 외면했다.
이번 연설에서 북한은 국제 분쟁의 책임을 서방에 돌리며 스스로를 '평화 지향 국가'로 포장하는 데 주력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러시아 정상과 나란히 선 전승절 열병식에 이어, 유엔 무대에서도 반서방 진영과의 연대를 본격화하려는 행보라는 평가다.
한편 김 부상은 유엔 뉴욕 체류 기간 중 쿠바·베네수엘라·니카라과 외교장관들과 연쇄 회동하며 ‘우호국 외교’에 공을 들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연설 수위 조절이다. 한미일의 군사 협력을 비난하며 핵무장의 정당성을 강조했지만, 이재명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은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 한국 역시 작년과 달리 답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난해 김성 유엔 주재 북한 대사의 연설 직후 한국 대표부가 공개 반박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특히 이 대통령의 'END 이니셔티브'와 '3단계 비핵화론'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END 이니셔티브'를 제시하며 남북 간 신뢰 회복과 상호 존중이 평화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면서도 "우호적으로 대하는 나라와 교류·협력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북미 대화 재개의 여지를 남겨둔 발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외교부는 북한 김 외무성 부상의 유엔 연설에 대해 "한반도의 비핵화는 한미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일관된 목표"라며 "유엔 차원에서도 일련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등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해 오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긴밀한 한미 공조 하에 포괄적인 대화를 통해 평화공존 및 공동성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지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대놓고 북핵 인정한 통일장관…"北, 美타격 가능 3대 국가"
2025 국제한반도포럼(GKF) 등 참석을 위해 독일 순방 중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9일(현지시간) "북한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3대 국가의 하나가 돼버렸다"며 "냉정하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를 꼬집은 취지이지만, 자칫 북한을 중국·러시아처럼 핵무기와 투발 수단을 모두 갖춘 완성된 핵보유국으로 격상시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 장관은 이날 베를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북한이 스스로 전략국가라고 말하는 데 전략적 위치가 달라졌다.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7년 전 위치와는 다르다. 일단 그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 장관이 언급한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3대 국가'는 북한 외에 중국·러시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재진입 기술을 완성했는지 확인된 바가 없어 미 본토 타격 능력을 갖췄다고 인정하는 건 섣부르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30일 기자들과 만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경각심 환기 차원"이라고 발언 배경을 설명했다. 정 장관은 미북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서는 "노동당 창건 80년 메시지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대미, 대남 메시지"라며 "그걸로 미뤄보면 북미 양쪽 지도자 모두 지금 서로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한 것"이라고 짚었다.
정 장관은 그러나 "북미관계를 통해 안보 대 안보를 교환한다면 미국은 지원하거나 돈을 낼 생각이 전혀 없지 않느냐"라며 "(개혁개방을 추구한) 베트남의 길을 가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말이 진정이라면 남북협력밖에는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 주장하는 '평화적 두 국가론'이 헌법과 충돌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선 "데팍토(de Facto·사실상의) 국가와 데주레(de Jure·법적인) 국가 승인, 그건 공리공담"이라며 "그렇게 해서 교류 협력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쪽에서 '적대적 두 국가, 교전 중인 두 국가' 이렇게 말해 대비돼서 그런 것"이라며 "윤석열 전 대통령이 후보가 되자마자 내건 다섯 자 구호 '북한은 주적',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그전에는 북한이 '주적은 미국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고 했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공든 탑을 쌓기 위해 땀 흘리며 애쓰는데 보수정권만 들어섰다 하면 허문다고 비난했다"면서 서독 마지막 총리이자 통일 독일 첫 총리를 지낸 중도보수 기독민주당(CDU) 소속 헬무트 콜은 이전 정부의 동방정책을 비판하면서도 교류협력은 중단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정부가 비핵화 원칙과 개념을 하나씩 밝히는 것보다 큰 그림을 통해 대북·통일·비핵화 정책을 마련하고, 때에 맞춰 공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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