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1963. ⓒ 데일리안 DB
삼양식품이 ‘삼양1963’이란 새 라면을 출시해 화제다. 신제품 출시 간담회에 이례적으로 그룹의 최고위층인 김정수 부회장이 직접 나섰다. 그 정도로 이 라면의 출시가 삼양에겐 뜻 깊은 사건이라는 뜻이다.
김 부회장은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여론 속에서 공업용 우지라는 단어가 우리를 무너뜨렸고, 공장에 불이 꺼지고 수많은 동료가 떠나야 했다"며 이번 신제품으로 작고한 창업주의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했다. 김동찬 삼양식품 대표도 "그 당시 이런 일들이 익명의 투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무책임한 일이었고 이 일로 한 기업이 무너질 뻔했다"라고 했다. 삼양1963 영상 광고에 등장하는 삼양 전 직원들은 “(당시) 시중에 깔린 라면들을 수거해야 했다”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분하고 억울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삼양에게 한 맺힌 그 사건은 1989년에 벌어졌다. 그해 11월 3일 ‘몇몇 기업이 비식용 우지를 썼다’는 익명의 투서가 검찰에 접수됐다. 삼양식품, 삼립유지, 서울하인즈, 오뚜기식품, 부산유지 등 5개 회사가 비식용 쇠기름을 썼다며, 관계자가 검찰에 의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여론은 음식 문제에 매우 민감하다. 온 국민이 자주 먹는 서민음식에 공업용 쇠기름이 들어갔다는 말이 나오자 국민적 공분이 터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양은 라면계를 대표하는 기업이었고, 삼양라면은 그야말로 국민라면이었기 때문에 국민의 충격과 분노가 삼양에 집중됐다.
하지만 검찰의 말과는 달리 보건사회부는 무해 판정을 내렸고, 정부가 구성한 식품위생검사 소위원회의 조사 결과도 문제가 없다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뇌리에 박힌 공업용 쇠기름의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라면계의 강자였던 삼양라면은 몰락하고 말았다. 당시 삼양의 라면 100만 박스 이상이 폐기되고, 직원도 1000명 이상 이직했다고 한다. 1997년에야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이 나왔지만 이미 삼양라면의 아성이 무너진 뒤였다.
당시 삼양은 쇠기름(우지)는 원래 비식용을 수입해 정제해서 쓰는 것이고, 오히려 정부가 그런 쇠기름의 사용을 권장했다고 했다. 돈을 아끼려고 쇠기름을 썼다는 의혹에 대해선 당시 팜유보다 쇠기름의 수입가가 톤당 100달러가 더 비쌌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삼양의 항변을 완전히 무시했다. 당시엔 ‘식물성’의 광풍이 불어서 뭐든지 식물성이 좋다고 했다. 그때 이후 라면엔 식물성 기름만 들어갔고, 그밖에 모든 요리 영역에서 식물성 기름이 권장됐다.
최근에서야 동물성 기름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현재 식물성 기름이 더 좋다는 주장과 동물성 기름이 더 좋다는 주장이 서로 다투는 중이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과거처럼 동물성 기름을 거의 독극물처럼 여기던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동물성 기름이 몸에도 좋고 풍미도 좋다며 일부러 찾기까지 한다. 이런 분위기가 되자 삼양이 89년의 한을 풀기 위해 쇠기름을 사용한 ‘삼양1963’을 출시한 것이다.
각 기름의 특성이야 전문가들이 판단할 일이니 그건 논외로 하고, 우리 시민사회의 합리성이란 측면에서 이 사건은 되새길 만한 사안이다. 당시 무해 판정이 나왔는데도 왜 그렇게 삼양라면을 악마화했고 많은 국민이 동조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비합리성이 그 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황토 화장품에 중금속이 있다는 소동이 있었고, 쓰레기 만두 파동도 있었다. 한동안 조미료인 MSG가 절대 금기 물질인 것처럼 몰아갔었는데 요즘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MSG도 무조건적 악마화의 대상이 아닌 전문가들의 조사가 필요한 물질로 보인다. 89년 논란은 검찰이 주도했지만 그후 터진 논란들은 일부 방송프로그램을 비롯한 언론이 주도했다. 특히 시청률을 노린 자극적 폭로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전문가들이 과학적으로 판단 내려야 하는 분야에 대중의 공포, 분노가 우선한다는 게 문제다. 여론이 비과학적으로 폭발할 때 냉각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못한 기관이나 언론, 섣부른 폭로로 대중 공분을 부채질한 일부 프로그램 등, 모두가 반성해야 89년 쇠기름 사태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번 ‘삼양1963’이 다양한 재료가 추가된 고가품으로 나왔는데, 일반적인 보급형 삼양라면의 쇠기름 버전도 출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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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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