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땀·눈물 딛고 빛을 향해…지독하게 아름다운 ‘국보’ [볼 만해?]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11.19 13:15  수정 2025.11.19 16:42

19일 개봉

야쿠자 가문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부키 명문 한지로 가문에 들어온 키쿠오(요시자와 료 분)는, 동갑내기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분)와 함께 온나가타를 꿈꾸며 매일 구슬땀을 흘린다. 스승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 분)가 병원에 입원하며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날, 한지로가 선택한 후계자는 아들이 아닌 키쿠오였다.


노력으로는 닿을 수 없다는 재능의 벽이 드러난 순간이자, 슌스케에게는 처음으로 패배가 몸을 파고드는 날이었다. 공연 당일 대기실에서 떨리는 손끝으로 "네 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고 울먹이는 키쿠오의 얼굴에 붉은 칠을 올리는 슌스케. 화장인지, 키쿠오가 그토록 원했던 피의 자국인지 모를 그 붉음이 두 사람의 운명에 첫 균열을 새긴다.


'국보'는 키쿠오가 인간 국보가 되기까지의 50년을 따라가는 작품으로, 재일 한국인 이상일 감독이 연출했다.


지난 6월 일본에서 개봉 후 흥행 수익 170억 엔을 돌파하며 일본 실사 영화 최고 흥행작인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173.5억 엔)에 근접했다. 올해 제78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제98회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 부문 일본 대표로도 선정됐다.


'국보'가 거대한 서사로서 설득력을 갖고 히트한 이유는 일본 가부키가 품어온 독특한 계승의 질서를 아름답고 우아한 결로 어루만지듯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부키에서는 선대 배우의 이름뿐 아니라 그가 다져온 배역과 표현법까지 자손에게 넘어가는 관습이 있다. 오랜 역사만큼 그 무게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가문 출신 배우들은 유년기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정통성을 다져왔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관계는 그 전통의 심장부를 건드린다. 한 사람은 타고난 재능을 지녔지만 외부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정통 혈통을 지녔지만 그 재능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렇게 키쿠오는 슌스케의 가문의 피를 열망하고, 슌스케는 키쿠오가 가진 타고난 빛을 탐한다.


175분의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국보'는 관객을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는다. 각 무대는 키쿠오와 슌스케의 내면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도록 정교하게 구성됐으며 자막으로 설명이 더해져 가부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다.


영화는 여러 가부키 무대를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배치하며 인물의 내면을 확장한다.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도조지', '소네자키 동반자살', '백로아가씨' 등 작품들은 키쿠오와 슌스케의 감정선에 맞닿으며 두 인물의 현재와 내면을 담아내는 서사를 넓히는 그릇이 된다.


'국보'의 미학은 키쿠오의 무대가 단순한 장식이나 볼거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대 위의 찬란함은 곧 깊은 공허를 품고, 빛이 강해질수록 인물의 고독 역시 또렷해진다. 이 공허와 고독을 누구보다 잘 아는 키쿠오지만, 최고의 가부키 배우가 되기 위해서라면 악마와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갈망이 깊다.


키쿠오를 연기한 요시자와 료는 이 서사의 무게를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그는 수개월간 가부키 동작과 호흡을 갈아 넣으며 인물의 결을 몸에 새겼고 그 결과 키쿠오의 흔들림·고독·광기에 숨결을 장면마다 불어넣었다.


영광의 대가는 언제나 상처의 바닥을 지나 도착한다.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고, 노력은 상처투성이가 될 만큼 요구된다. 때로는 누군가의 피를 보아야 하고, 스스로 지켜온 순수의 일부를 잃어야 한다. 찬란함은 자신을 다 태워버리는 고통으로 완성되는 비극이자 빛이다. 이상일 감독은 이 아름답고 잔혹한 여정을 장대한 서사와 섬세한 미장센, 호흡을 조율한 음악, 압도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정교하게 맞물려 한 장면도 흘려보내지 않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19일 개봉. 러닝타임 17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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