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테이크',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D:쇼트 시네마(146)]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1.13 11:10  수정 2026.01.13 11:10

박세영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어느 산속 영화 촬영 현장. 배우 윤배(김윤배 분)는 손이 결박된 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약 15초 분량의 장면을 반복해서 연기하고 있다. 이미 테이크 수는 97번을 넘겼다. 짧은 장면이지만 윤배는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만 더 촬영하자며 스태프들을 설득한다. 지친 현장의 공기 속에서 98번째 테이크가 진행되지만 결과는 여전히 미흡하다.


제작 PD는 이제 충분하다며 촬영을 마무리하자고 하지만, 윤배는 물러서지 않는다. 결국 99번째 테이크가 시작되고, 윤배는 마침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연기를 해낸다.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그의 연기에 집중하고, 촬영이 끝난 뒤에는 박수와 찬사가 이어진다. 윤배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나 곧 화면은 전환된다. 방금까지의 촬영 현장은 실제 영화 세트가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삼각대 위에 놓여 있고, 윤배는 혼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오디션용 연기 영상을 촬영 중이었던 것이다. 만족스러운 테이크를 확인하려는 순간, 오디션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배역 설정이 바뀌었으니 다른 연기 영상을 보내줄 수 있겠느냐는 요청이다.


99번째 테이크 끝에 도달한 완성은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간다. 윤배는 잠시 아쉬워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테이크를 준비한다.


이 영화는 단 15초의 연기를 위해 99번의 테이크를 반복하는 무명 배우의 하루를 통해, 완벽주의와 생존 사이에 놓인 배우의 현실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초반부 관객은 자연스럽게 윤배를 ‘촬영 현장에서 고집을 부리는 배우’로 인식하게 된다. 반복되는 테이크, 지친 스태프들, 이를 말리는 제작 PD까지. 익숙한 영화 현장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오해를 유도한다. 마침내 99번째 테이크에서 완성된 연기와 스태프들의 박수는, 배우의 집념이 보상받는 순간처럼 연출된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삼각대가 드러나는 반전은 이 모든 맥락을 단숨에 뒤집는다. 윤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기 위해 혼자서 ‘현장’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스태프와 제작 PD는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던 가상의 청중이었다. 이 설정은 무명 배우가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윤배의 집념을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완벽주의자이지만 동시에 불안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살려달라면서 시키는대로 모든지 할 수 있는 대사가 윤배의 꿈을 향한 절박함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더 나은 연기를 향한 욕망이자, 선택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다른 표현이다. 영화는 이 양가적인 감정을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99번째 테이크로 겨우 도달한 만족이 단번에 무효화되는 순간에도, 그는 주저앉지 않고 다음 연기를 준비한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건 성공의 서사가 아니라 과정의 태도다. 결과가 아닌 반복을 견디는 자세, 한 번의 완성에 집착하기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 '이제 그만해도 충분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고, 또 한 번의 테이크를 받아들이는 선택은 배우를 넘어 꿈을 향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러닝타임 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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