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페리아, 자동차 전장 부품 필수 요소인 레거시 반도체 생산
美·中 경쟁격화로 中당국, 넥스페리아 통제에 나서 본사와 갈등
네덜란드 본사, 이달초 中넥스페리아 직원 업무계정 전격 폐쇄
中당국, ‘세계 반도체 공급망 위기’ 가능성 거론하며 강력 반발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0월 30일 김해국제공항 공군기지 나래마루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AP/뉴시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중국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Nexperia·安世半導體)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본부는 지난 3일 중국 회사 전 직원의 업무용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계정을 전격 폐쇄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워드 프로세서나 엑셀, 파워포인트 하나 열리지 않는 중국 회사 직원들은 꺼진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덜란드와 중국이 자동차용 반도체 업체 넥스페리아를 둘러싸고 또다시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지난 7일 보도했다. 중국 상무부가 네덜란드 본사가 넥스페리아 직원들의 업무계정 접속을 막았다는 중국 회사 측 발표 이후 ‘세계 반도체 공급망 위기’ 가능성을 거론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이날 “넥스페리아가 이번에 중국 회사 직원들의 업무계정을 대규모로 사용 금지시켰다”며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고 기업 협상에 어려움·장애를 만들었다”고 맹비난했다. 이어 “넥스페리아의 조치는 기업의 정상적인 생산·경영을 심각히 파괴한다”며 “다시 세계 반도체 공급망 위기가 초래된다면 네덜란드 측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회사 측은 앞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3일 오후 시작된 업무용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계정 폐쇄 조치로 중국 지역 직원들이 오피스365(업무용 소프트웨어 패키지 상품)와 SAP(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 업무용 프로그램) 등에 정상적으로 접속하지 못해 생산과 기업 운영에 중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긴급 대처에 나서 핵심 시스템과 생산 관리를 복구했다”며 “향후 잠재적 영향을 줄이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 네이메헌시에 있는 넥스페리아 본사. ⓒ AP/뉴시스
넥스페리아는 레거시(범용) 반도체 시장에서 ‘작은 거인’으로 불린다. 개별 단가는 낮지만 자동차 전장(전자장치)과 전자기기에 없어선 안 될 각종 필수 반도체 부품을 생산한다. 자동차 한 대에는 넥스페리아 반도체 부품이 수백 개가 들어간다. 이 가운데 ▲라이다·레이다 등 각종 센서 ▲차량용 네트워크 ▲에어백 ▲브레이크 잠김방지 시스템(ABS) ▲조명 ▲냉각팬 등 자동차 전자장치의 거의 모든 부분에 넥스페리아 부품이 활용된다.
넥스페리아가 주로 생산하는 레거시 반도체는 트랜지스터 등 단일 전자소자로 구성돼 한 가지 기능만 수행하는 개별소자 칩(일명 디스크리트 칩)이다. 그 기술적 난도와 수익성은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칩에 집어넣은 최신 집적회로(IC) 칩보다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중국이 넥스페리아를 인수한 까닭은 전자·자동차 등 전략산업 분야에서 ‘소재·부품·완제품’의 수직적 생태계 자립화를 이루기 위해서다.
세계 최대 전기자동차 생산국인 중국은 자동차용 반도체 자급률을 2027년까지 100%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넥스페리아의 레거시 반도체는 자동차 전자장치 부품의 필수 요소다. 이들 제품은 차량의 기본 작동에 기초가 되는 저비용, 저마진 부품이며 단기간에 교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만큼 넥스페리아는 글로벌 자동차용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 선두를 달리며 자동차 업계의 ‘급소’를 쥐고 있는 셈이다.
넥스페리아는 비록 자동차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1.2%(글로벌 19위) 수준에 불과하지만 레거시 반도체와 전력 반도체는 각각 세계 1위와 2위다. 반도체 소자인 ‘스몰 시그널 다이오드’ ‘스몰 시그널 모스펫’ 등에서도 세계 1위를 달린다. 이 덕에 현대자동차와 일본 도요타를 비롯해 폴크스바겐(폭스바겐)과 BMW, 메르세데스 벤츠 등 독일 주요 완성차 기업의 핵심 부품에 필수적으로 탑재되는 레거시 반도체 분야의 명실상부한 1위 기업이다.
중국 베이징시 둥창안제에 있는 상무부 청사. ⓒ 뉴시스
이런 경쟁력은 넥스페리아가 60년이 넘는 유럽 반도체 산업 유산을 계승한 덕분이다. 세계적 전자기업인 필립스의 반도체 사업부가 2017년 분사해 설립된 NXP반도체의 표준제품 사업부가 넥스페리아 전신이다. 필립스는 앞서 2006년 경영난 타개를 위해 반도체 부문을 분리해 NXP반도체를 세웠다.
이후 NXP반도체가 저가의 대량생산용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 로직칩 부문을 넥스페리아로 공식 분사시켰다. 필립스로부터 분사한 지 10년째인 2016년 저부가가치의 ‘레거시 반도체’ 제조 사업부를 매각했다. 중국 국유 투자기업인 JIC캐피털 산하의 펀드 등이 인수한 것이다.
27억 5000만 달러(약 4조 500억원)에 반도체 사업부를 사들인 중국 펀드들은 이듬해 '넥스페리아'라는 이름의 회사로 탈바꿈시킨 뒤 2019년 스마트폰 제조업체 원타이커지(聞泰科技·WingTech)에 36억 달러를 받고 지분(79.9%)을 되팔았다. 이 과정은 관치금융 자금으로 외국 테크기업을 사들인 뒤 자국 기업으로 다시 넘기는 중국 정부 주도의 전형적인 ‘기술사냥’ 수법이다.
원타이커지는 중국 중앙·지방정부 산하 펀드가 약 30% 지분을 보유한 사실상 국유기업이나 다름없다. 원타이커지 창업자 장쉐정(張學政)이 2020년 넥스페리아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하며 직접 경영에 나섰다. 넥스페리아는 당시에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 기업의 인수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2018년은 서방과 중국 간 기술갈등이 첨예하지 않았는 데다 넥스페리아 부품이 레거시 제품이다 보니 보안 우려도 크게 제기되지 않았다.
중국 남부 광둥성 둥관시에 있는 넥스페리아 공장. ⓒ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홈페이지 캡처
기술안보 논란은 2021년에 불거졌다. 원타이커지는 그해 반도체 사업 확장을 위해 영국 반도체 웨이퍼 기업 ‘뉴포트 웨이퍼 팹’(Newport Wafer Fab)을 인수했다. 하지만 미국이 압박하고 영국에서도 국가안보 우려가 커졌다. 결국 영국 정부는 2022년 국가안보법을 발동해 원타이커지에 뉴포트 웨이퍼 팹 지분 매각을 명령했다. 서방 국가가 중국 자본의 반도체 자산 인수를 강제 철회시킨 첫 사례다.
이를 계기로 기술안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과 유럽은 넥스페리아를 면밀히 주시했다. 미 상무부는 2024년 12월 원타이커지를 수출통제 블랙리스트에 올려 미 기업이 원타이커지와 자회사에 첨단기술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네덜란드는 지난해 9월 뒤늦게 넥스페리아 경영에 개입했다. 미 정부가 네덜란드 정부에 비공식 경로를 통해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넥스페리아가 미국 시장에 계속 제품을 팔려면 중국 국적 경영진 장쉐정 CEO를 해임해야 한다."
미국 시장을 잃을 수 없었던 네덜란드는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국가안보 관련 법령을 다시 꺼내 넥스페리아의 경영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핵심 기술이 모기업 원타이커지로 무단 이전될 수 있다는 우려를 명분으로 삼았다. 네덜란드 정부는 9월30일 처음으로 자국의 ‘상품가용성법’을 발동해 장쉐정의 CEO 자격을 정지하고 넥스페리아 경영권을 장악하는 비상 조치를 취했다.
ⓒ 자료: 외신종합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와 유럽 땅에서 핵심적인 기술 지식, 역량의 연속성과 이를 보호하는 데 위협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장쉐정 넥스페리아 전 CEO는 독일과 영국 넥스페리아 공장에서 주요 설비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네덜란드에서 획득한 특허를 중국으로 이전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격분한 중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10월4일 넥스페리아의 중국 내 공장과 하청업체의 제품 수출을 금지했다. 이 조치는 공급 대란 우려로 이어졌다. 중국 공장은 넥스페리아 전체 생산량의 80%를 맡고 있다. 넥스페리아는 독일 함부르크와 영국 맨체스터 등 유럽에서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생산한다. 하지만 이를 잘라 칩으로 만드는 패키징(후공정)의 70%를 광둥(廣東)성 둥관(東莞) 공장에 의존하고 있다.
네덜란드 본사가 넥스페리아가 독일과 영국에 웨이퍼 팹을 소유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패키징 및 테스트 운영은 중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중국 정부가 사실상 회사의 최종 생산단계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해 글로벌 공급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본사와 중국 회사 간의 갈등이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 자료: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
전 세계 자동차 업계는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 사태에 직면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로이터통신은 "넥스페리아는 연간 1100억 개 이상의 기초 칩을 생산하며 이 같은 규모는 글로벌 자동차용 디스크리트 칩 시장의 5% 정도를 차지한다"고 보도했다. 수치상 5%지만 대체 불가능한 특정 부품이 하나만 없어도 수천만원짜리 완성차 조립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지난해 10월30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김해공항 공군기지 의전실인 나래마루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상호 수출통제 조치를 1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빈센트 카레만스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이 11월1일 “공급망 안전이 확인됐다”며 통제 수위를 낮추고 중국도 넥스페리아 칩 수출금지를 풀어 개별 기업 단위로 허가를 내주면서 위기는 일단 봉합됐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와 중국의 갈등은 계속되는 상황이다. 암스테르담 본사가 중국 회사 전 직원의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계정에 대한 접근을 일괄 차단했다. 업무용 소프트웨어가 전면 차단된 중국 회사의 사무실은 사실상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넥스페리아 본사는 6일 소프트웨어 차단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같은 날 대부분의 계정을 복구하며 "생산 공정에는 영향이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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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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