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공동체를 짓다…큐레이션이 만드는 예술 생태계 [공연 큐레이션③]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3.27 07:57  수정 2026.03.27 07:57

패키지 효과로 비인기 공연도 '덩달아' 매진 효과

공연 당일 '노쇼' 악순환 막을 대책 필요

"대학로도 '지역구 공동 패키지' 등 개발 이뤄졌으면"

공연계에 확산한 큐레이션과 구독 경제의 궁극적인 가치는 극장의 상업적 매출 증대와 마케팅 성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상업 시장의 자본 논리에서 철저히 소외되기 쉬운 비인기 순수 예술 장르를 보호하고, 창작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켜내는 최후의 ‘안전망’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예술의전당

가장 직접적인 순기능은 극장이 철저히 계산해 설계한 ‘패키지 티켓’을 통한 관객 분산에서 확인된다. 극장들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춰 티켓 파워가 확실한 대형 흥행작을 이른바 ‘미끼 상품’으로 삼거나, 장르 특화 패키지를 구성한다. 일례로 LG아트센터의 ‘콤파스26 더블 패키지’는 크리스탈 파이트, 알렉산더 에크만의 현대무용과 ‘바냐 삼촌’ 등 연극 신작 6편을 하나로 묶어 25%의 높은 할인을 제공한다. 관객은 할인을 적용받기 위해 평소라면 예매하지 않았을 낯선 장르의 공연도 기꺼이 자신의 관람 일정에 포함시킨다.


세종문화회관의 ‘2026 세종시즌’ 프로그램 라인업 역시 이러한 전략이 돋보인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Part II 인 콘서트’, ‘정명훈xKBS교향악단x김선욱 베토벤+브람스’, 서울시극단의 연극 ‘말벌’(THE WASP), 서울시오페라단의 ‘나부코’, 서울시무용단의 다채로운 창작 무용 등 압도적인 대중성을 지닌 기획 공연과 순수 예술 기반의 산하 예술단 공연까지 촘촘히 배치했다.


실제 국립극장의 레퍼토리 시즌 관련 연구 데이터에 따르면, 2012년 시즌제와 패키지 티켓을 처음 도입한 첫해 65%에 머물렀던 전체 기획 공연 객석 점유율은 3년 뒤인 2015년 92%로 대폭 상승했다. 한 순수예술 단체에 몸담고 있는 연출가 A씨는 “단일 공연으로는 객석의 절반을 채우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극장의 패키지 큐레이션 시스템에 편승해 안정적인 관객을 확보하게 된다”며 “패키지를 통해 우연히 우리 공연을 본 관객이 다음 시즌에는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선순환이 일어나며, 창작자는 흥행 참패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작품성에만 몰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정기적인 구독과 패키지 구매는 파편화된 개별 관객들을 극장 산하의 거대한 ‘취향 공동체’로 묶어낸다. 같은 시즌을 장기 구독하는 관객들은 극장이 별도로 주최하는 관객과의 대화, 백스테이지 투어, 사전 렉처 프로그램 등에 반복적으로 참여하며 소속감과 연대감을 형성한다.


3년 전 예술의전당 유료 멤버십에 가입했다는 직장인 B씨는 “매년 분기별로 극장을 찾다 보니 회원 가입을 해서 혜택까지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특정 연주자의 팬은 아니라 이 극장이 추구하는 예술적인 철학 자체를 지지하게 되는 것 같다. 단순히 개별 작품을 예매해 볼 때는 특정 작품의 소비자였다면, 지금은 극장의 ‘든든한 후원자’된 듯한 자부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도가 정착함에 따라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작용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장 치명적인 맹점은 기형적인 ‘패키지 노쇼’(No-show) 현상이다. 일부 관객이 특정 인기 공연의 좋은 좌석(R석, VIP석 등)을 선점하기 위해 여러 공연이 묶인 패키지를 구매한 뒤, 정작 비인기 장르의 공연 당일에는 극장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다.


특히 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나 국립극장의 레퍼토리 시즌에서 이러한 현상이 빈번하게 목격된다. 압도적인 티켓 파워를 지닌 스타 연주자의 협연이나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끄는 창극의 좌석을 선점하기 위해 전체 패키지를 결제한다. 그리고 패키지에 묶인 나머지 순수 교향곡 연주나 무용단 공연 당일에는 불참하는 경우다. 패키지는 규정상 개별 공연의 부분 취소가 불가능해 관객은 표를 버리는 쪽을 택한다.


한 전통음악 기획자 C씨는 “전산상으로는 매진에 가까운 회차였는데 실제 공연 당일에는 객석 중앙이 텅 비어 있는 상황들이 있다. 그런 공연은 대부분 인기 작품의 패키지로 묶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는 무대를 준비한 창작자와 단원들의 의욕을 꺾는 것은 물론이고, 정작 관람을 원하는 일반 관객들의 예매조차 막는 악순환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극장들은 노쇼로 인한 빈자리를 막고 실제 관객을 유치하기 위한 보완책을 마련하기도 한다. LG아트센터는 동일한 좌석 등급으로만 묶도록 규정하는 패키지를 선보이고, 장르별 패키지를 세분화해 무분별한 끼워팔기를 방지하기도 한다. 또한 압도적인 티켓 파워를 가진 이른바 ‘빅티켓’ 공연은 아예 패키지 구성에서 제외하는 방식도 취한다.


일각에선 사전 취소 없는 노쇼 누적 시 다음 시즌 패키지 구매 자격을 박탈하는 ‘삼진아웃제’를 도입하거나, 관람을 포기한 좌석을 공연 2~3일 전 극장에 미리 반납하면 포인트를 지급하는 ‘티켓 기부제’를 도입해, 회수된 빈자리를 문화소외계층이나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제도적 보완도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대규모 자본과 인프라를 갖춘 대형 극장과 공공극장뿐만 아니라, 생존을 고심하는 중소규모 극장들의 목소리도 있다. 한 대학로 소극장 대표는 “이미 대형 공공극장과 거대 플랫폼을 중심으로 큐레이션과 구독 모델이 정착되고, 향후에도 공연계 전반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이라며 “다만 자본력과 마케팅 인프라가 부족한 대학로 중소극장이나 민간 극단들도 함께 연합해 ‘지역구 공동 패키지’를 구성하는 등 다양한 응용 모델 개발도 이뤄질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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