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대신 '공장' 판다…공급망 위기 뚫는 K-중후장대

백서원 기자 (sw100@dailian.co.kr)

입력 2026.03.30 11:50  수정 2026.03.30 11:51

조선, 완제품 수출 넘어 스마트 조선소 플랫폼 상품화

방산 현지 생산 거점 확보...무기 자급자족 수요 공략

'제조 마진' 대신 '시스템 로열티'…수익 구조 대전환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HD현대중공업

국내 중후장대 산업의 생존 전략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장기화되는 지정학적 리스크로 글로벌 물류망이 불안해지자 완제품 수출에만 의존하던 기존 방식으로는 성장의 한계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탈(脫)제조’와 ‘플랫폼’으로 압축된다. 업체들은 배와 무기를 만들어 파는 단계를 넘어 조선소를 짓는 노하우와 방산 공장 운영 시스템 자체를 수출하는 ‘제조 플랫폼 이식’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동 전쟁 등 지정학적 갈등으로 공급망 리스크가 커지면서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폴란드 등 주요국들 사이에서는 '제조 자립'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분위기다. 무기를 사 오고 싶어도 운송 경로가 막히거나, 자국 내 방위 산업 인프라를 직접 갖춰 안보 불안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다. 한국 중후장대 기업들은 이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기술 수출의 기회로 전환하고 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조선업계다. HD현대의 조선 중간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오는 31일 열리는 정기 주총에서 ‘디지털 엔지니어링·매뉴팩처링 플랫폼 개발 및 공급업’을 사업 목적으로 추가한다. 선박 건조 기술을 넘어 ‘스마트 조선소 구축 시스템’ 자체를 상품화하겠다는 의미다. 배를 주문받는 방식에서 탈피해 조선소를 짓고 싶어 하는 국가에 설계부터 로봇 공정, 운영 소프트웨어(SW)까지 패키지로 판매하는 역발상 수출 모델이다.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 역시 이러한 흐름에 가세했다. 삼성중공업은 미국 내 선박 개조 및 조선소 현대화 컨설팅 사업을 확대하며 제조 노하우 판매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화오션은 신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을 정관에 명시하며 조선 기술을 해상 풍력 인프라 구축으로 확장하고 있다. 해양 인프라 전반을 설계하는 솔루션 기업으로도 영역을 넓히는 모양새다.


방산업계의 현지화 전략도 구체화됐다. 업체들은 무기 완제품 수출을 넘어 해외 현지에 직접 생산 거점을 확보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루마니아에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차량 생산 공장을 착공했고, 현대로템은 폴란드 정부와 협력해 K2 전차의 현지 생산 라인 구축을 추진 중이다. 수출국의 자급자족 수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현지 생산 거점을 통해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산업의 정체성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행보도 이어지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이번 주총에서 ‘항공기 및 우주선 발사 서비스업’을 추가하며 제조를 넘어 서비스 영역으로의 진출을 공식화했다. LIG넥스원 또한 ‘LIG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LIG D&A)’로 사명을 변경하며 유도무기 전문 기업에서 항공·우주·전자전을 아우르는 통합 방산 기업으로의 전환을 확정 지었다.


이러한 대전환을 뒷받침하는 투자 규모도 ‘매머드급’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2028년까지 11조원, 현대로템이 1조8000억원 이상을 투입한다. 주요 방산 기업이 향후 수년간 10조원을 넘어서는 재원을 ‘뉴 스페이스’와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 집중하며 산업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행보를 현재의 수주 호황기(슈퍼사이클) 이후를 대비한 생존 전략으로도 보고 있다. 제조업은 경기 변동에 따라 실적 변동폭이 큰 산업이지만 제조 플랫폼과 시스템을 수출하면 수익 구조가 안정화된다. 한 번 구축된 스마트 조선소와 방산 기지는 한국의 소프트웨어와 부품 공급 없이는 정상 가동이 어렵다. 결국 하드웨어 판매 마진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시스템 관리 로열티’가 미래 수익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K-중후장대는 제조사를 넘어 글로벌 산업 인프라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국내 제조 기업들이 공장이라는 하드웨어를 넘어 운용 시스템이라는 소프트웨어 권력을 쥐기 시작하는 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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