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함에 담긴 목숨값…'함진아비'가 건네는 공포의 청첩장 [D:쇼트 시네마(154)]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4.01 11:01  수정 2026.04.01 11:01

이상민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함진아비란 한국의 전통 혼례 풍습에서 신랑 측이 신부 측에 보내는 예물 상자인 ‘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말한다. 보통 신랑과 가장 가까운 친구가 맡아 얼굴에 숯을 칠하고 “함 사세요!”를 외치며 잔치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한다. 액운을 막고 양가의 화합을 기원하는 이 풍습은 함진아비에서 전혀 다른 결로 변주된다.


공장에서 일하던 철규는 어느 날 옛 친구 영훈으로부터 결혼식 함진아비를 부탁받는다. 선뜻 내키지 않던 그는 상대가 ‘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에 이끌리듯 친구 낙균과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마을에 도착한 순간부터 분위기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축축하게 내려앉은 공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영훈, “순이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심장한 당부, 그리고 교회 제단 위에 올려진 썩은 돼지머리까지. 불길한 징조들은 일상적인 풍경을 공포로 만든다.


두 사람은 함을 팔기 위해 순이의 이름을 부르지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이내 용서를 구하며 무너진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것은 고운 한복을 입은 순이의 시신이다. 도망치던 낙균마저 붙잡혀 목숨을 잃고, 철규 역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마을 사람들과 죽은 이들이 함께 찍는 기념사진 속에 박제된다.


'함진아비'는 단순한 공포 체험을 넘어, 인물의 죄의식이 서서히 조여오는 심리적 압박으로 변환되는 지점이 인상적이다. 철규가 짊어진 함의 내용이나 그의 용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서사는 과거의 죄가 어떤 방식으로도 상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밀어붙이며, 인과의 질서를 냉정하게 작동시킨다.


형식적 완성도 역시 이를 지지한다. 눅진한 공기를 눌러 담은 카메라 앵글은 공간을 폐쇄적으로 압축하고, 배우들의 미세한 떨림은 불안을 점층적으로 증폭시킨다. 여기에 절제된 사운드 운용이 더해지며 공포는 과장되지 않은 채 지속된다.


결말의 기념사진 장면은 이 모든 장치를 한 번에 매듭짓는다. 응징은 원혼에 머물지 않고, 마을 공동체 전체의 행위로 확장된다. 그럼에도 저주가 끝났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이 미완의 상태가 공포를 봉합하지 않은 채 남겨두며, 단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응축된 형태의 불안을 완성한다. 러닝타임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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