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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방북때 김정일, 당간부 숙청한 이유가...


입력 2013.08.19 09:22 수정 2013.08.20 14:28        김소정 기자

<단독>소식통 "개혁 개방 주장한 간부들 탄압"

"해임된 간부들 호소하자 가족까지 수용소로"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녹취록 파문이 커지면서 2007년 10.4선언 직후 통일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개혁·개방’이라는 단어가 전부 삭제된 점이 언론에 회자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수행원들에게 “북측이 개혁·개방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낀다. 서울에 가면 정부는 이 말을 쓰지 말아아겠다”고 언급한 데 따른 조치였다고 한다.

정부가 김정일 비위 맞추기에 급급할 그 즈음 북한에선 김정은에 대한 권력 이양이 시작되면서 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큰 비리도 없는 당 간부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면서 오히려 내부에서 개혁개방 주장까지 나왔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대북소식통은 최근 '데일리안'과의 만남에서 “2007년 시작된 김정일의 중앙당 기구 개편 지시에 따라 당시 ‘청년장군’으로 불리던 김정은이 간부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2009년 화폐개혁까지 단행되자 당 간부들 사이에서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개혁개방에 대한 주장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할 당시는 김정은에 대한 권력승계가 시작될 시점이었다”면서 “김정일은 이를 위해 몇 년에 걸쳐 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탄압을 자행했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방북한 바로 그해 10월 초 김정일은 중앙당 기구 개편을 명분으로 100명 가량의 당 간부들을 숙청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사실 크게 비리를 저지르지도 않았던 간부들에 대한 탄압이 중앙당 기구 개편을 명분으로 시작됐고, 이후 2009년 12월 1일 화폐개혁이 단행될 때까지 김정일은 별의별 명분을 다 붙여서 간부들을 정리해나갔다”고 설명했다.

2007년 10월 초 김정일의 “중앙당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말 한마디에 따라 중앙당 조직부에서 100명 정도의 과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해임되면서 그들이 살던 집까지 전부 몰수당했다. 이 때문에 해임된 간부들이 집단으로 김정일에게 호소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김정일은 그들 9명과 그 가족들까지 15호 정치범관리소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북한 내부에서 간부들 사이에 노골적인 불만이 조성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 조선중앙TV가 보도한 김 위원장과 김정은의 대동강 그물공장 현지지도 모습. ⓒ연합뉴스

이후에도 김정일은 이듬해인 2008년 중앙당 재정경리부였던 리봉수와 과장급 간부들을 또다시 숙청해 정치범관리소로 보내자 간부들 사이에 ‘당과 국가에 충실해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고 한다.

2009년 6월 25일 김정은이 내린 첫 공식 지시도 '간부 길들이기'로 시작됐다. 평양시 공원에서 장기와 카드 등을 하는 사람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었다고 한다. 소식통은 “공원에서 장기를 둘 정도면 간부급이므로 역시 당 간부에 대한 탄압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가 중심이 되고 각 지방에서 올라온 기동타격대까지 합세해서 평양시 공원을 불시에 습격하는 작전을 벌여 장기와 카드를 즐기던 사람들을 잡아들였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심지어 비행기까지 동원해 러시아에 가서 일하던 사람들까지 잡아들였으며, 이렇게 해서 그해 8월 한달동안 약 400여 세대가 평양시에서 추방됐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통상 2~7년간의 교화형에 처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중 2009년 12월 1일 김정일이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중대 조치라는 명분을 내세워 화폐개혁을 단행하자 간부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소식통은 “2010년 1월 1일부로 개인이 달러를 쓰지 못한다는 인민보안부의 포고가 발표되자 간부들 중에선 ‘이제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무기명 편지를 김정일 앞으로 보내는 사람도 나왔다”고 말했다.

원래 화폐개혁은 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2002년에 찍어놓은 화폐로 바꿔준 다음 2010년 3월 다시 화폐를 2009년도에 찍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었지만 달러를 많이 소유하고 있던 간부들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김정일과 김정은은 화폐개혁이 실패하자 애먼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과 상업상에 책임을 물어 총살시켰다”고 했다.

이즈음 김정일과 김정은이 간부들에 대해 단행한 어이없는 조치는 이뿐이 아니었다. 2006년 6월에는 국방위원회 지시로 전국의 아파트에서 베란다 창문을 없애도록 했다. 조선식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김정은은 2011년 1월 초 여성도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에 앞서 군사복무를 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특히 중앙당 비서국 대상 간부 자녀들을 중앙대학에 보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또다시 원성이 쏟아졌다.

이런 일들이 이어지던 중 2010년 4월 18일 중앙당 1접수 앞에 1000여명의 평양시민들이 모여 국가기관의 비리 행위에 대해 항의 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7~2010년 사이 수백명의 젊은 여성들이 취업을 빌미로 국가기관에 의해 돈을 갈취당하고 성적 유린을 당한 사건을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정부 반대시위는 아니었지만 주민들이 사전에 약속해서 집단으로 모여 정부에 항의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로 기록됐다.

☞ 관련기사 ‘3년전 평양 시내서 1천명 모여 주민 봉기 충격’


소식통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 이양이 진행될 당시 특권층만 산다던 평양시에도 꽃제비들과 거주자가 넘쳐났다”면서 “오죽했으면 2010년 9월 초 김정은이 평양시 꽃제비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포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김씨 왕조라 불리는 북한에서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세습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간부들을 숙청시키고 탄압하는 '공포 정치'를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김정은은 2009년 좌천시켰던 김격식을 다시 북한군 총참모장으로 임명하면서 군부 달래기에 부심한 모습이다. 최룡해를 전격 기용할 때 거센 반발을 일으켰던 리영호와 같은 세력이 또다시 나올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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