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미치다④-스웨덴 스톡홀름2>씨줄 날줄로 얽힌 감라 스탄 골목
골목은 좁다. 하늘을 다 가릴 만큼 높은 중세의 건물들 때문에 골목은 더 좁고 어둡다. 거친 돌바닥은 얇은 신발을 뚫고 통증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 좁아터진 골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그 골목은 늘 행복한 시간이 흔하게 널려 있다.
여행자에게 말을 거는 깊고 푸른 골목들
스톡홀름 감라 스탄(Gamla Stan)의 골목을 올 때마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넓은 광장에서 웃는 것과는 다른 행복을 읽는다. 크지 않은 가게들을 보면서 희한해 하는 사람들, 아무렇게나 튀어나와 있는 작은 간판이 예쁘다고 눈을 못 떼는 사람들, 그러다가 자그마한 동상이라도 발견하면 달려들어 사진 찍는다고 법석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행복해 보인다.
감라 스탄 대광장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씨줄 날줄로 얽힌 골목들은 높이가 10여m가 넘는 건물들 사이로 비좁게 나 있다. 한눈이라도 팔다보면 갑자기 달려드는 나무에 부딪히기도 하고, 벤치에서 쉬고있는 여행자의 발에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감라 스탄의 골목들은 아주 어린 시절 동네 골목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니며 셜록 홈즈 놀이를 하던 시절로 기억을 되돌려 놓는다. 비록 그 시절의 골목이 가난과 지저분함으로 깨끗한 감라 스탄의 골목과는 다르다고 해도 이 골목들을 올 때마다 내 기억은 40년 가까이 타임워프 된다.
골목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전설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제각각 다른 이야기들이 500년의 시간동안 그 골목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다시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감라 스탄에서 가장 사람들이 북쩍이는 골목은 ‘서쪽에 있는 긴 거리’라는 뜻의 베스테르롱가탄이다. 이름처럼 가장 길고 넓은 골목이다. 길 양 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기념품 가게와 카페, 레스토랑이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어떤 때는 내 의지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흐름에 내 몸이 쓸려 다니는 느낌이지만, 그 분주함과 복잡함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다. 그래서 스톡홀름에 올 때마다 서너번 이상 들리지만 질리지 않는다.
베스테르롱가탄과 평행을 이루는 동쪽의 바로 옆 작은 골목은 프레스트가탄이라고 불린다. ‘사제의 길’이라는 뜻이다. 19세기까지는 이 길을 통해 루터교 사제들이 대성당이나 독일교회 등으로 다녔다.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이 골목길은 늘 조용하다. 한 블록 떨어진 베스테르롱가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골목 양 옆으로 이어진 노란색 벽의 건물들은 제각각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사제들이 지나갈 때마다 숙연히 손 모아 기도를 했을까? 자극적이지 않은 노란색 벽은 들뜨지 않고 오히려 더 차분하다.
베스테르롱가탄의 서쪽 끝부분에서 프레스트가탄으로 이어지는 아주 작은 골목이 감라 스탄 골목의 절정인 모르텐 트로치그 그렌이다. 사실 스웨덴어로 ‘가탄’은 골목이라기 보다 거리라는 뜻이다. 골목보다는 좀 큰 개념이다. 진짜 우리말로 골목이라고 표현할 단어가 ‘그렌’이다. 모르텐 트로치그는 16세기 독일에서 온 이민자다. 돈을 많이 벌어 감라 스탄에 건물을 짓고 그 건물 사이의 골목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감라 스탄 골목길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 골목은 너비가 90cm에 불과하다. 19세기 중엽 양쪽 끝을 막았다가 100년쯤 지난 1945년 다시 길을 열었다. 베스테르롱가탄에서 프레스트가탄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경사의 36개 계단에는 무슨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을까? 그 이야기 때문인지 이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은 길을 지나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심히 계단을 바라보며 자기 이야기를 이 속에 재우는 듯 보인다.
‘상인의 광장’으로 불리는 곳으로 이어진 골목을 쾨프만가탄이라고 부른다. 쾨프만가탄은 감라 스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이다. 이 골목길에는 감라 스탄에서도 가장 오래된 상점들이 군데군데 있다. 주로 오래된 물건을 파는 골동품 가게들이다. 가게에 들어서면 아주 오래된 물건들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운이 좋으면 15세기 이전 바이킹 시대의 물건도 볼 수 있다. 가게마다 취급하는 품목이 다르지만 금은 세공품에서부터 오래된 은제 식기, 그리고 스웨덴의 옛 문양이 그려진 카페트 등이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그저 구경만 할 뿐이다. 값은 거의 보물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귀한 고서적을 제법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서점도 있다.
쾨프만가탄을 수 놓고 있는 또 다른 멋진 곳은 갤러리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그림만을 전시하며 팔고 있는 갤러리부터 도저히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추상화 갤러리까지 즐비하다. 이 가게들은 간판마저 너무 아름답다. 골목 끝에는 덴마크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스웨덴의 전설을 다룬 '상티 요란(St. Joran - 세인트 조지와 용)이라는 동상이 있다. 대성당에 있는 그 조각의 청동 모조품이다.
자그마한 의자를 꺼내 들고 나와 골목 사이에서 작게 들이치는 햇볕을 받고 있는 한 노인은 “감라 스탄의 골목은 언제나 황금으로 빛난다”고 얘기한다. 건물 3, 4층 자그마한 유리창문에 얼굴을 내민 예쁜 꼬마 아이는 “우리집은 천국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쾨프만가탄에서 행복한 웨딩 촬영을 하는 순백의 신부는 “좁은 골목이 포근한 신혼 침대의 이불이 돼 온전히 벗은 몸을 편하게 감싼다”고 얘기한다.
사실 그 골목들이 나에게 무엇을 얘기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내가 느끼는대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 골목은 때로는 시끌벅쩍한 수다를 떨기도 하고, 또 때로는 외마디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잘 들리지도 않게 조용히 속삭이는가 하면,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의 귀를 쉬게 해주기도 한다. 그런 골목의 이야기 소리에 왜 귀를 기울일까? 그것은 적어도 우리 인생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나칠 수 있는 길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내가 스톡홀름에 올 때마다 반드시 여러 차례 감라 스탄의 골목을 찾은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엔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있지만, 또 아무런 소리 없는 휴식을 주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과 북아현동의, 그리고 내가 자란 응암동 후미진 골목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처참하게 부서지고 정비되는 것이 더욱 아픈 이야이기도 하다.
스톡홀름에서는 감라 스탄의 골목말고도 걸어서 행복한 길이 또 있다. 섬과 섬을 넘나드는 호숫가의 길들이 그렇다. 맑은 날이면 늘 눈이 시리도록 파란 호수, 그 호수 위에 편안히 떠 있는 크고 작은 배들, 그 호수를 내려다 보듯 점잖게 서 있는 고풍스런 건물들. 그 사이사이를 걷다보면 편안한 문명의 이기인 다른 교통수단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푸른호수가 내뿜는 소나타를 들으며 걷는다
스톡홀름 시내를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트램을 탈 수도 있고, 2층으로 된 사이트시잉 버스를 탈 수도 있다. 지하로 다니는 메트로는 밖을 볼 수 없으니 그렇다고해도. 심지어는 버스처럼 5개 정거장 아무 곳에서나 타고 내리며 멜라렌 호수 위 섬들을 이어주는 운하를 따라 천천히 유람하는 ‘타고내리는 보트 투어(Hop-on, Hop-off Boat Tour)’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스톡홀름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두 다리에 의지하고 눈을 이용하는 것이리라.
스톡홀름의 랜드마크는 시청 건물이다.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약 5분 정도 걷다보면 시청사가 나온다. 내셔널 로만 양식의 시청사는 멜라렌 호수라는 뛰어난 풍광을 그대로 안고 있어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 파란 호수를 바탕으로 한 검붉은 시청사는 1923년 건축가인 라그나르 오스트벨리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궁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시청사는 모두 800만 개의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전체적으로는 내셔널 로만 양식이지만 창문은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외부와 내부엔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금박 장식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106m 높이의 탑에 올라가면 스톡홀름 시내가 완전히 조망된다. 스톡홀름 시청 1층 블루홀에서 매년 12월 그 해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축하파티가 열린다.
시청사 2층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황금의 방이다. 정면에는 스웨덴의 평화를 상징하는 여신의 그림이 무려 1800만개의 금박으로 모자이크 돼 있다. 뿐만 아니라 방의 천장과 맞닿은 사면도 금박으로 장식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1층 블루홀에서 피로연을 마친 노벨상 수상자들은 이곳 항금의 방으로 자리를 옮겨 무도회를 연다.
지금은 서울 시청도 나름 시민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한다. 시청 앞 서울 광장의 잔디밭이나 시청 건물 지하의 시민청이 그렇다. 하지만 그건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서울시청 건물은 권위의 공간이었다. 시민과 공무원의 차단이 철저하게 이뤄진 곳이었다. 그런데 스톡홀름 시청은 이미 이 건물이 완공된 그 날부터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공무원들의 사무실과 시의회 등 극히 일부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시민에게 개방된 공간이다. 멜라렌 호수를 바라보며 일광욕을 하기도 하고,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기도 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간. 그래서 그들은 스톡홀름에 사는 것을 그토록 행복해 하는 걸까?
스톡홀름 시내를 천천히 걸어서 다니는 것이 행복한 또 다른 이유는, 그저 발 닫는대로 가면 굳이 감라 스탄이 아니더라도 고풍스런 건물이 줄지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건물의 용도가 호텔이건 미술관이건 또는 비즈니스 센터건 별 의미없다. 그 건물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늘 그렇게 그곳에 서서 시민들과 여행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청사에서 별 생각없이 호수가에 줄지어 선 요트며 보트며 고기잡이 배들을 보면서 동쪽으로 걷다보면 스웨덴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유르고덴섬이 나온다. 그곳은 박물관의 섬이다. 바사호 박물관과 세계 최초의 야외 민속 박물관인 스칸센, 그리고 북방민족 박물관과 가장 최근에 지어진 아바 박물관 등 무려 100여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으로 가득한 섬이다.
바사호 박물관은, 스웨덴의 전설적인 전함인 바사호를 전시한 곳이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인 바사호는 스웨덴이 최강의 해양대국이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왕 때 건립된 것이다. 전체 길이가 62m에 달하고, 최대 폭이 11.7m, 높이가 50m인 거대한 이 전함은 30년 전쟁(1618~1648)에 참전하기 위해 1628년 8월 10일 건조됐지만 항해를 시작한 지 불과 20분만에 32m 깊이의 바다로 침몰했다. 대포를 너무 많이 실은 탓이었다.
그 바사호는 300년 이상 바닷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1961년 인양됐다. 300년의 시간동안 전설로만 전해지던 바사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스웨덴은 물론 전세계가 그 아름다움에 놀랐다. 바사호는 분명 전함이었지만 180개의 조각품을 비롯해 마치 호화로운 유람선같이 엄청난 장식으로 치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사호 박물관에서 다시 동쪽으로 10여분을 걷다보면 세계 최초의 야외박물관인 스칸센(Skansen)이 나온다. 스웨덴의 민속학자인 하셀리우스라는 사람이 1891년 자기 사재를 털어서 만든 민속박물관이다. 이곳엔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스웨덴의 전통 가옥 150채가 들어서 있다. 그것들은 박물관 개관 당시 새로 지은 모조품이 아니고, 스웨덴 방방곡곡에서 마차로 실어온 당시의 실제 건물들이다.
스칸센에서 나오면 그 일대가 스톡홀름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책길이다. 그 산책길을 따라 다시 서쪽으로 걷다보면 웅장한 자태의 북방민족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박물관 또한 하셀리우스가 1907년 자기 돈을 들여서 세운 것이다. 이 박물관은 북유럽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스칸센이 15세기 이후 스웨덴의 풍속을 보여준다면, 북방민족 박물관은 15세기 이전 바이킹의 풍속과 다양한 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스웨덴의 유명한 조각가인 칼 밀이 조각한 구스타프 바사왕의 기마상이 눈에 띈다.
감라 스탄과 유르고덴섬에서 스톡홀름의 지나온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면 세르옐 광장(Sergelstorg) 주변에서는 디자인 강국 스웨덴의 현재를 느낄 수 있다. 감라 스탄 입구 국회의사당 건너편에서 세르옐 광장에 이르는 보행자 전용 도로인 드로트닝가탄(Drottninggatan)과 그 주변은 스톡홀름 최대의 쇼핑가다. 웅장한 규모의 NK 백화점을 비롯해 디자인이 돋보이는 갤러리안 백화점 등이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고, 특히 젊은 층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다.
스톡홀름 젊은이들의 만남의 광장이자, 길거리 문화의 메카 노릇을 하는 세르옐 광장은 스톡홀름 문화회관이 감싸듯 안고 있다. 그 한쪽에 있는 160m 높이의 유리탑은 스톡홀름 젊은이들의 뜨거운 몸짓을 내려다보며 스웨덴이 다양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흡족해 하는 듯 하다.
현재 스웨덴 국왕인 칼 구스타프 16세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드로트닝홀름 궁전(Drottningholm Place)은 차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시청사 앞 보트 정거장에서 배를 타면 더 멋진 입장을 할 수 있다. 1756년에 프랑스 바로크 양식으로 완성된 왕궁은 과거 왕족들의 사냥터였던 곳이다. 궁전 안 600여개의 방은 화려한 가구와 그림, 카페트와 크리스탈 상들리에로 빛난다.
그러나 드로트닝홀름 궁전의 압권은 뒤쪽으로 난 멋진 정원이다. 그런데 이 정원, 어딘가 눈에 익는다. 자연스럽게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과 오스트리아 빈의 쇤부른 궁전이 떠오른다. 17세기 ‘왕의 정원사이자 정원사의 왕’이라는 수식이 붙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원사앙드레 르 노트르의 영향을 받은 바로크풍 정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베르사유나 쉰부른의 그것에 비하면 작고 소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와중에도 멋들어지게 꾸며진 정원은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스톡홀름은 행복한 도시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천국이다. 정형화 되지도 않고, 획일적이지도 않은 삶의 다양성을 최대 가치로 여기는 시민들의 공간이다. 그들은 남의 간섭을 의식하지도 않지만, 그러면서도 체질화된 나름의 질서로 이 도시를 지난 500년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삶의 치열함 속에 열심히 일하지만 잘 쉬고, 바쁘게 움직이지만 순간순간 충분한 여유도 만끽한다. 아침 출근길에 호숫가에 잠시 들려 낚시를 하는 여유로움도 있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자기 보트에 갈매기의 분비물이 떨어진 것을 보고 호숫물을 떠 대청소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거리에서 자신들의 여름 햇살을 닮은 미소를 잠시도 얼굴에서 떼내지 않는다.
늘 푸른 공원은 젊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과 노래로 떠들썩하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행복한 비명을 연신 질러대는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것이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삶. 사고가 구속되지 않다보니 별의별 희한한 발상으로 아무 것이나 멋진 것을 만들어내는 기발한 창의력. 스톡홀름의 햇살을 맞으며 거리를 걷다보면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방인이면서도 나 조차 그들의 그 무한한 자유에 몸이 젖는다.
한없이 즐기고 누리되, 도시를 구성하는 그 어느 것 하나 개인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고 인식하는 도시. 굳이 세계 최고의 복지를 누리고, 자연환경 속에 산다고 강조하지 않아도 그들의 삶 그 어디에도 행복하지 않은 얼굴은 없어보이는 스웨덴 스톡홀름. 그곳은 행복을 아는 사람들이 이방인에게까지도 그 행복을 전염시키는 낙원이다.
글·사진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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