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미치다⑭-핀란드 헬싱키>한 박자 느린 삶의 속도
“핀란드의 갈매기는 뚱뚱하다. 어릴 적 기르던 고양이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음식을 맛나게 먹는 통통한 갈매기가 나는 좋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잔잔한 여성 영화 ‘카모메 식당’은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여주인공 사치에의 독백으로 시작한 영화는 평화롭게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가진 항구를 따라 카메라가 돌아간다. 이 영화 속 항구가 바로 ‘발트해의 처녀’로 불리는 핀란드(Finland)의 수도 헬싱키(Helsinki)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 가장 올바르고 행복한 공교육의 현장, 가장 뛰어난 디자인 천재들의 나라, 핀란드를 수식하는 말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민과 산타크로스, 그리고 ‘핀란디아’의 시벨리우스의 나라인 핀란드는 사실 자신의 역사를 통틀어 거의 ‘자신의 역사’를 가져보지 못한 불행한 나라였다.
핀란드의 정식 국명은 ‘핀란드 공화국’이다. 하지만 이는 영어식 이름이고, 핀란드어로는 수오멘 타사발타(Suomen Tasavalta)라고 부르고 줄여서 수오미(Suomi)라고 부른다. 전 국토에 퍼져 있는 19만개가 넘는 호수, 수오(Suo)가 핀란드어로 호수를 뜻한다. 즉 호수의 공화국인 셈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호수와 침엽수림으로 뒤덮힌 나라, 수도인 헬싱키가 북위 60도선 이북에 있으니 전 국토가 북극권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지만 핀란드의 역사는 완벽한 피지배의 역사다.
12세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150년 경 핀란드는 스웨덴의 지배에 들어간다. 스웨덴의 국왕 에리크 9세와 웁살라의 주교 헨리는 스웨덴 기독교의 전파 목적으로 핀란드 땅을 침공해 복속한다. 그리고 1809년까지 무려 660년 동안 핀란드는 스웨덴의 속국으로 지낸다. 1809년에 핀란드가 스웨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독립이 된 것은 아니다. 북유럽으로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제정 러시아는 스웨덴과 이미 18세기부터 핀란드를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1809년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핀란드의 지배자는 스웨덴에서 제정 러시아로 바뀐다. 그리고 100년 하고도 8년이 지난 1917년에 와서야 비로소 핀란드는 소련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하고 제 나라를 갖게 된 것이다.
스웨덴에게 660년, 제정 러시아를 거쳐 소련에 이르기까지 108년, 도합 770년 가까운 세월을 제 나라 없이 남의 나라의 속국으로 지내온 핀란드는, 그래서 분명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일 수 있다. 하지만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고 난 후 눈부신 산업의 발전과 정치와 경제 민주화에 성공한 핀란드는 오늘 날에 와서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복지를 누리는 가장 행복한 이들의 나라가 돼 있다.
그 핀란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수도 헬싱키는, 사실 유럽 각국의 수도 중 가장 젊은 수도다. 스웨덴이 지배하던 시절 핀란드의 수도는 헬싱키에서 북서쪽으로 160km 떨어진 곳에 있는 투르쿠(Turku)였다. 1550년 스웨덴의 국부 구스타프 바사왕이 스웨덴의 러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건설하기 사직한 게 헬싱키다. 그래서 헬싱키는 오랜 시간 스웨덴어로 헬싱포르스(Helsingfors)로 불린다. 그러다가 제정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빼앗은 후 투르쿠를 너무 싫어해 1812년 스웨덴의 무역 거점 도시였던 헬싱키로 수도를 옮겼고, 현재의 헬싱키 남항을 중심으로 계획도시를 세웠다. 즉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나, 수백 년의 역사가 숨 쉬는 파리 런던 빈 등과는 달리 헬싱키는 불과 2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청년 도시’인 셈이다.
헬싱키로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비록 국적기는 아니지만 핀란드 국적기인 핀 에어가 인천공항에 취항하는 덕에 몇 년 전부터 헬싱키까지 직항으로 오갈 수 있다. 우리나라 국적기가 가는 러시아의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헬싱키 여행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발한 대형 크루즈 바이킹라인으로 시작했다.
오후 5시 스톡홀름의 슬루센(Slussen) 항구에서 출발한 헬싱키행 바이킹라인은, 전에 라트비아 리가를 갈 때 탔던 실야라인과 마찬가지로 스톡홀름 주변 2만여 개의 섬들을 누비는 군도 투어를 거쳐 발트해에 접어든다. 그리고 밤새 백야의 발트해를 달려 다음 날 아침 10시 경 짙푸른 돔 지붕을 지닌 헬싱키 대성당이 한 눈에 들어오는 헬싱키 남항으로 들어간다.
여느 항구가 디 그렇지만 헬싱키 항구도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스웨덴과 러시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들어오는 호화 유람선이 타고 내리는 항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한적한 어촌의 항구라고 하기에는 제법 규모가 큰, 깨끗하게 정돈됐지만 활기차고 행복한 표정을 지닌 사람들로 충분히 시끌벅적한 정겨운 항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헬싱키에 첫 눈길이 닿는 여행자들을 휘어잡는 헬싱키의 매력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지는 마켓광장(Kauppatori)이라고 불리는 항구시장의 활달함이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시쳇말처럼 신선한 과일과 채소, 생선 등 해산물을 비롯해, 투박하지만 실용적인 농기구나 배에서 쓰이는 도구들부터 노천 시장에서 파는 물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디자인된 유리 제품에 이르기 까지 항구 시장은 그곳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헬싱키 여행의 절반은 이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나는 공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항구시장을 품은 헬싱키 항구를 더 멋지고 정겹게 만드는 것은 항구 시장 바로 옆에 있는 항구 식당이다. 붉은 천막 아래 정갈하게 놓인 흰붉은 식탁들이 먼저 여행자의 눈을 끌고, 아름다운 핀란드 아가씨가 분주하게 만들어내는 음식 냄새가 결국 잡아끄는 항구 식당은 감히 헬싱키 최고의 여행코스라고 ‘선언’하고픈 마음이 들게 한다.
부산 대변항에서 맛볼 수 있는 멸치회에 쓰이는 큼지막한 멸치만한 크기의 생선 ‘무이꾸(Muikut)’는 헬싱키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먼저 한 번 기름에 튀긴 후 철판에 살짝 볶은 무이꾸만 간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거기에 철판에서 볶은 밥과 채소를 곁들이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오죽했으면 헬싱키 시민들은 사진을 찍을 때도 “치즈”라고 하지 않고 “무리꾸”라고 한다니...
그런데 항구 식당에서 무이꾸를 먹다보면 ‘카모메 식당’의 안주인인 사치에가 말한 ‘뚱뚱한 핀란드 갈매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깨닫게 된다. 헬싱키 항구를 날아다니는 갈매기가 유난이 뚱뚱해 보이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먹는 무이꾸를 약탈해서 먹기 때문이다. 특히 헬싱키 시민이 아닌 낯선 여행자들은 무이꾸의 맛에 반해 정신 못차리고 있을 때 갈매기들은 여행자의 식탁을 빠르고 과감하게 습격한다. 무이꾸를 놓고 ‘겸상’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항구 식당 여기저기에는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써 있다. 사치에가 어릴 적 기르던 고양이를 생각하며 좋아하던 갈매기가 사실 헬싱키 시당국에게는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이 항구 식당을 유명하게 만드는 또 하나는 핀란드 대통령들이다. 핀란드의 역대 대통령들은 종종 이 항구 식당에 나와 무이꾸 등으로 식사를 한다. 대개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거나, 극히 최소의 경호원만을 데리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를 찾는 외국의 국가원수를 이 곳에 데려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오찬을 베풀기도 한다. 항구 식당 한 켠의 한 천막 카페에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 핀란드를 방문한 외국의 국가원수나 주요한 정치인들이 길에 서서 커피와 도너츠를 먹는 사진을 붙여놓기도 했다. 핀란드 역대 대통령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항구식당 길 건너편에 대통령궁이 있기 때문이다.
항구 식당에서 ‘지상 최고의 오찬’을 즐기고 대통령궁과, 대통령궁보다 더 크고 웅장한 스웨덴 대사관을 거쳐 트램의 선로를 따라 도심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갑자기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원로원 광장(Senate Square)이다. 약 40만개에 달하는 화강암으로 바닥을 깐 정사각형의 이 광장은 헬싱키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공간이면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제정 러시아가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빼앗은 후 수도를 헬싱키로 삼고 곧바로 새로운 도시계획을 세웠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건축가인 카를 엥겔을 불러들인 러시아의 황제는 그에게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새로운 도시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하나의 단서를 붙인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은 느낌의 도시를 만들라”는 것이다. ‘성 베드로의 성’이라는 뜻을 지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당시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고, ‘유럽으로 열린 창(窓)’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헬싱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원로원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헬싱키 대성당(Tuomiokirkko)은 헬싱키의 등대같은 존재이면서 랜드마크다. 이 건물도 카를 엥겔의 작품이다. 특히 하늘이 맑아 새파란 날이면 계단 아래서 올려다본 대성당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신 상아빛 건물과 밝은 녹색의 돔이 어우러져 환상의 조하를 이룬다.
루터교가 국교인 핀란드의 종교적 중심이고 루터교의 총본산인 대성당은 1852년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당시 러시아 황제의 이름을 따 니콜라이 교회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59년에 와서 대성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파리의 젊은이들이 몽마르뜨 언덕 사크레쾨르 성당 앞 계단에, 로마 청년들이 삼위일체 교회 아래 스페인 계단에 모이듯 헬싱키의 젊은이들은 대성당 앞 계단에 앉아서 원로원 광장을 둘러보는 것을 즐긴다.
대성당 앞 계단 맨 아래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은 제정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다. 그런데 의아해할 일이다. 100년이 넘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독립 후 헬싱키 시민들은 왜 이 동상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둔 걸까? 사실 핀란드 국민들은 알렉산드르 2세 황제에 대해 상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스웨덴의 지배 하에서 핀란드 사람들은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 당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한가지의 배려는 핀란드 사람들이 피지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면서도 유독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해서만은 존경심을 버리지 않는 이유였던 것이다.
대성당 앞 계단에 헬싱키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는 또 있다. 계단에 앉아서 바라본 오른쪽의 건물이 바로 헬싱키 대학교다. 스웨덴 지배 때인 1640년 크리스티나 여왕에 의해 설립된 헬싱키 대학교는 북유럽에서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와 더불어 가장 오랜 역사와 학문적 업적을 자랑하는 곳이다. 특히 대성당 정문과 마주보는 헬싱키 대학교의 도서관은 핀란드 지성의 보고 역할을 하고, 또 지금은 북유럽에서 가장 많은 외국 유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으로 유명한 곳이다.
헬싱키 대학교에는 우리나라의 유학생들의 유독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핀란드의 언어와 종족의 특성에 기인한 바도 있다. 핀란드라는 나라 이름은 핀(Fin)족의 땅(Land)라는 뜻이다. 원래 핀족은 중앙아시아와 우랄 산맥 지역에 거주하던 우랄알타이어족으로 8세기 경 에스토니아를 거쳐 지금의 핀란드 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원래는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지닌 아시아계통의 인종이었는데, 이후 스웨덴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혼혈이 생성돼 지금은 스웨덴 등의 게르만 민족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스웨덴 등의 유럽 어족과는 상당히 다르고 오히려 우리말과 어순이 같다. 헬싱키 대학교에 우리나라 유학생이 많은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이유로 추정된다.
헬싱키의 역사지구격인 원로원 광장 주변을 둘러보고 나면 가장 현대적이고 활기찬 에스플라나디(Esplanadi) 공원을 중심으로 한 쇼핑가와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에스플라나디 공원 양 옆 길인 포효이스 에스플라나디 거리와 에텔레 에스플라나디 거리는 ‘세계 최강의 디자인 강국’인 핀란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장들이 줄지어 있다. 그래서 이 길을 걸을 때 여행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지고, 멈추기를 반복한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길가에서 매장의 쇼윈도우만 쳐다봐도 핀란드의 독특하고 섬세하며 아름답고 찬란한 디자인 명품들에 넋을 빼앗기게 된다.
한 여름 평균 기온이 20도 안팎인 헬싱키에서도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식처는 에스플라나디 공원이다. 특히 헬싱키의 긴 겨울이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하지 무렵에 헬싱키 시민들은 집 안에 있는 시간보다 에스플라나디 공원에 나와 있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한다. 짙푸른 잔디 위며, 단아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벤치, 심지어는 잔디밭과 인도를 구분한 경계블록 위까지 빼곡하게 앉은 헬싱키 시민들을 보면 낯선 이방의 여행자들은 의아해 하기도 한다.
에스플라나디 공원 부근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 중 하나는, 북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서점 아카데미아(Academia)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미도리가 토베 얀손의 동화 ‘무민 계곡의 여름’을 읽고 있는 카페 알토도 이 서점 안에 있다. 그런데 북유럽 최대의 규모라고는 하지만 서점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서울의 대형서점 등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크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지상 3층 규모라고는 하지만 천천히 돌아다니다보면 오히려 소박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 서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동화 코너다. 위에서 언급한 토베 얀손의 ‘무민’ 시리즈에 몰리는 사람들은 비단 헬싱키 시민들만이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도 ‘무민’ 시리즈를 사거나 보기 위해 운집해 있다. 하마 모양이지만 딱히 하마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귀여운 동물 무민은 핀란드의 대표적인 동화작가인 토베 얀손이 탄생시킨 상상의 동물이다. 1945년부터 1970년까지 25년을 연재해 그 시리즈만 해도 엄청나게 방대하다. 핀란드 사람들은 ‘무민’ 시리즈를 보고 자라 자식들에게 무민 시리즈를 물려준다고 한다. 그만큼 핀란드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동화인데, 대부분 핀란드어로 돼 있어서 동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한 동물들의 이야기가 평화롭게 그려져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에스플라나디 공원을 천천히 걸어서 다시 항구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분수대 하나가 등장한다. 헬싱키를 ‘발트해의 처녀’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 서 있다. 네 마리의 물개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나체 여인의 조각, 하비스 아만다(Havis Amanda) 조각이다. 핀란드 조각가인 빌 발그렌이 1908년 프랑스 파리에서 만든 것이다. 19살의 파리 여성 마르셀 델큐니를 모델로 제작한 것인데, 나중에 핀란드가 독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곳으로 옮겨놓았다. 처음에는 그냥 ‘인어’상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핀란드와 스웨덴의 신문들이 ‘하비스 아만다’라는 헬싱키 탄생 설화 속의 여인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 조각이 처음 파리에서 왔을 때는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시민들이 외면했고, 심지어는 ‘파리에서 온 매춘부’라고 부르기 까지 했다.
헬싱키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따로 있었다. 루터교의 나라인 핀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통하는 우스펜스키 교회(Uspenskin-Katedraali)다. 헬싱키 남항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이 러시아 정교회 건물은 헬싱키 대성당과 함께 헬싱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제정 러시아가 지배하던 1868년 완성된 이 교회는 전형적인 비잔틴 슬라브 양식으로 강렬한 적벽돌과 황금색의 화려한 양파 모양 돔이 눈길을 끈다. 러시아나 동유럽을 여행하지 않고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것이 동방정교회 건축물이다 보니 그만큼의 호기심이 많았을 것이다.
전남대 인류학과 이기중 교수는 북유럽을 소개한 한 책에서 헬싱키 여행을 일컬어 ‘느린 삶의 미학’이라는 말과 함께 ‘한 박자 느린 삶의 속도’라고 했다. 실제 헬싱키의 여기저기를 걷다보면 사람들의 몸짓이든, 장사치들의 움직임이든 바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수백 년의 시간 남에 의해 지배당해 왔고, 19세기에 이르러서 민족주의 정서가 고양되면서 독립을 위해 수천 명이 목숨을 바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겨우 독립을 이루고 난 후 세계 최고의 복지를 위해 또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부단한 노력으로 살아왔다. 그런데도 그들에게서는 조금도 서두르는 듯한, 급한 듯한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주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찬란하고 오래된 문화유산을 가진 것도 아니고, 충분한 인적자원을 보유해 풍요로움을 누린 것도 아니지만, 핀란드인들은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은 그 행복한 결실을 만끽하고 있다. 유럽 속 아시아 인종이라는 것, 우리와 같은 어순을 지닌 언어를 사용하는 우랄알타이어계통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거친 저항의 역사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등의 요소가 아니더라도 유럽에서 가장 젊은 도시 헬싱키는 충분하 매력으로 다음을 기약하게 만든다.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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