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스의 이순신' 테미스토클레스, 아테네를 구하다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입력 2015.06.14 08:22  수정 2015.06.14 08:46

<박경귀의 ad Greece 57>최초의 해군력 창설에 지휘도 탁월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확고한 의지와 혜안을 가진 지도자가 없으면 그 국난을 극복할 수 없다. 어느 국가든 백척간두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면 반드시 융성의 기회가 온다. 기원전 480년 제3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을 받아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아테네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뿐만 아니라 그리스 세계 전체를 공멸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다. 엄청난 대군으로 형성된 페르시아의 육군과 해군이 에게 해의 섬과 그리스 본토의 여러 나라들을 굴복시키며 파죽지세로 몰려 왔기 때문이다. 무적의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그리스 세계의 최후의 보루가 되고자 앞장섰던 국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이들 두 나라의 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현명한 위기극복 방법을 결정하고 이에 대한 국론을 통일시키는 일이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국난을 맞아 델포이에 있는 예언의 신 아폴론의 계시를 묻고, 국가의 방략을 물었다. 스파르타는 왕이 전사할 것이라는 비극적 예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전 시민이 결사 항전의 의지를 모았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유적, 그리스인들은 국가의 중대사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해 델포이의 아폴론 신의 계시를 들어 해결하는 관습을 중요하게 여겼다. ⓒ박경귀

아테네인들에게 내려진 여사제 아리스토니케의 신탁도 절망적이었다. 페르시아에 맞서 싸울 꿈도 꾸지 말고 달아나라는 얘기였다.

“가련한 자들이여, 왜 여기 앉아 있는가? 그대들은 집과,
그대들의 도시로 둘러싸인 높은 언덕들을 떠나 대지의 끝으로
도망쳐라. 머리도 몸도 굳건하게 버티지 못할 것이며,
아래쪽의 두 발과 두 손과 그사이에 있는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불과 쉬리아의 전차를 타고 질주하는
날카로운 아레스가 모든 것을 끌어내리리라.

그는 그대들의 성채뿐 아니라 다른 성채도 수없이
파괴하리라. 그는 수많은 신전을 파괴적인 불에 넘겨줄 것인즉,
신전들은 지금 벌써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서서
두려움에 떨고, 지붕에서 검은 피를 쏟고 있으니,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예견했기 때문이니라.
자, 그대들은 이 신전에서 나가 마음속으로 실컷 슬퍼하라!“('역사' Ⅶ 140)


온 도시가 불타고 파괴될 것이라면 이는 곧 아테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낙담한 아테네 사절단은 탄원자로서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방책을 내려달라고 애원했다. 두 번째 예언은 이러했다.

“팔라스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교묘한 재치로 애원한다 해도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리라.
그래서 나는 재차 그대에게 강철처럼 단단한 말을 하리라.
케크롭스 언덕과 신성한 키타이론 산골짜기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지만 트리토게네이아(아테나)여, 멀리 보시는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teichos xylinon)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들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 그대는 대륙에서
기병과 보병의 대군이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등을 돌려 도망쳐라. 언젠가는 적군과 맞설 날이 다가오리라.
신성한 살라미스 섬이여. 데메테르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할 때, 너는 여인들의 자식들을 죽이게 되리라.“ ('역사' Ⅶ 141)


이 예언에는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 들어있었다. ‘나무 성벽’이 파괴되지 않고 도와준다는 것인데 도대체 ‘나무 성벽’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또 죽이게 될 ‘여인들의 자식들’은 어느 편을 의미하는 것인가? 델포이의 신탁의 의미 해석을 둘러싸고 아테네 시민들의 의견이 분분해졌다.

나무 성벽이 아크로폴리스를 둘러싼 적이 있는 가시나무 울타리를 의미한다면 나무 성채를 보강하여 아크로폴리스에서 결사 항전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성벽’은 곧 함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해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성한 살라미스 섬이여’라는 구절이 승전을 암시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탁견이었다.

그런데 해전을 하려면 아테네의 모든 재산과 건물, 농토가 있는 아티카 전체를 포기해야 한다. 즉 전 국토를 적의 수중에 고스란히 내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참으로 괴로운 선택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전 국민을 살생시킬 수 있는 무모한 방법이었다. 결국 아테네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아티카 전역을 적에게 내주고 함대를 동원하여 해전으로 기사회생을 노려보기로 결정한다. 해전을 위해 전 국토를 비우는 청야(淸野) 작전은 그야말로 아테네의 마지막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적 안목에 따른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아테네는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아테네는 독자적인 해전을 벌일 만큼 변변한 해군을 갖고 있지 못했다. 군사력의 중점을 중장보병 운용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90년 제2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마라톤 전투의 승전은 바로 중장보병의 탁월한 전력에 힘입었던 것이다. 그 이후 아테네의 국방정책은 중산층 시민이 스스로 무장을 갖추어 참전하는 중장보병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해군에 비해 육군은 병력의 유지비나 전비가 훨씬 적게 들었으므로 저비용 고효율의 군대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티카의 연안 촌락들은 30여 년 동안 당시 최강의 해군을 갖춘 인근의 섬나라 아이기나 해군의 침략과 노략질에 시달려 왔었다. 따라서 함선을 건조하여 아이기나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해군력을 보유하는 게 아테네가 당면한 숙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해군력을 일시에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가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에 행운의 여신이 손짓했다. 아티카 남단의 라우레이온 광산에서 은광이 발견된 것이다. 은의 채굴로 엄청난 국고 수입이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터진 ‘대박’에 아테네 시민들은 환호했다. 시민들은 횡재라도 만난 듯 은광의 수입을 전 시민들에게 고르게 배분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때 테미스토클레스의 혜안이 빛났다. 그는 은광 수입의 배분에 반대하고 그 돈은 아테네를 늘 괴롭히던 아이기나와의 해전에 대비해 함선 200척을 건조하는 데 써야 한다고 시민들을 설득했다.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 항구를 바라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동상 ⓒ박경귀

당장 돈이 손이 들어오길 기대했던 시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설득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지만 은 채굴로 생긴 막대한 국고 수입으로 건조한 함선 200척은 아테네가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이 터지기 불과 3년 전인 기원전 48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이기나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구축한 이 ‘나무 장벽’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를 구할 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아테네가 예기치 않게 생긴 막대한 국부를 시민들의 요구에 영합하여 그대로 나누어주었다면 아테네는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테미스토클레스와 같은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는 최소한 기사회생할 조건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당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위해 필자는 이 곳을 두 차례 답사했다. 2014년 8월과 2015년 5월이었다. 작년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페라마 항구의 주변을 돌며 살라미스 해협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쳤다. 올해는 차량을 싣는 대형 여객선을 타고 살라미스 섬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배로 15분 정도 소요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배를 타고 해협을 오가며 주변의 지형지세를 살펴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이 좁은 해협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상대로 운명을 건 결전을 벌였다. 아테네는 살라미스 승전을 통해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전쟁 상황을 되짚어 보기 위해 25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보자.

전쟁이 발발하자 아테네 함대를 주력군으로 형성한 그리스 연합 함대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 그리스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기 위해 에우보이아 섬의 북단 아르테미시온에 진을 폈다. 이곳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몇 차례의 작은 접전을 승리로 이끌며 그리스 수병들은 세 배가 넘는 페르시아 대함대에 대한 공포심을 조금씩 줄여 나갈 수 있었다.

아티카 본토 가까이 있는 에우보이아 섬, 이 섬의 북단에 아르테미시온이 있었다. 현재는 본토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쉽게 드나들 수 있다. 그리스 연합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는 이 좁은 해협을 통해 살라미스 해협으로 이동했다. ⓒ박경귀

아테네 역사상 최초의 해군력 창설의 일등공신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의 지휘에서도 탁월한 기지와 전략을 선보였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그리스 군 진영에 함선 일부를 파견하여 육군의 전투 상황을 수시로 파악하고 합동 작전에 활용하고 있었다. 이런 치밀한 준비는 열세에 있던 그리스 해군이 적절하게 출전하고 후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300 결사대가 전멸하며 방어선이 무너지자, 이 소식을 그리스 함선이 즉각 그리스 함대의 본진에 알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진지에 밤새 화톳불을 피워 계속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 후 밤중을 이용해 전 함선을 살라미스 해협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불과 몇 시간 빠른 함대의 철수는 그리스 함대를 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퇴각을 하면서도 교란 작전을 펼 만큼 영악했다. 그는 페르시아 군이 상륙하거나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있으면 그 주변에 커다란 글자를 새겨 넣은 돌을 세웠다. 페르시아 대왕의 요구에 마지못해 참전한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인들을 겨냥한 심리작전이었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자존감을 고취시키며 자유의 수호에 동참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현대전에서 적병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전단지를 살포하는 작전에 버금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오니아 사람이여,
할 수 있다면 메디아인(페르시아인)을 버리고 그리스 쪽에 붙어라.
그리스인이야말로 고귀한 민족이며, 올바른 역사를 써 내려갈 위대한
선조가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이 고귀한 민족의 자유를 위해
생명을 걸로 싸우고 있다.
만일 원조가 불가능하다면 사력을 다해 조금이나마
페르시아 군을 방해하고 교란시켜라.“


페르시아 함대는 날이 밝고 나서야 그리스 해군이 철수한 것을 알게 된다. 페르시아 해군은 테르모필레 지역에 해군을 파견하지 않은 탓에 페르시아 육군이 그리스 육군을 괴멸시킨 소식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페르시아 해군이 육군의 승전 소식을 먼저 알았더라면, 사기가 충천한 페르시아 해군을 몰아 그리스 해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살라미스 해전을 애초에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이미 텅 빈 아티카 지역이 유린되는 것은 물론 아테네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테르모필레 방어선을 돌파한 페르시아 대군은 물밀 듯이 그리스 남부 지방으로 쳐들어왔다. 아테네 전 시가지는 불에 타고 쑥대밭이 되었다. 아크로폴리스의 둘레에 목책을 세우고 이를 승리를 가져다줄 ‘나무 성벽’으로 여긴 시민 일부는 도시를 떠나 살라미스 섬으로 소개(疏開)하라는 정부의 포고를 무시하고 아크로폴리스에서 결사항전 했다가 모조리 몰살당했다.

신아크로폴리스 박물관 3층에서 바라본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전경, 견고한 방벽과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이 보인다. ⓒ박경귀

페르시아 병사들은 아크로폴리스 위에 있던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신전들을 불태우고 파괴했다. 아무도 없는 아티카 농촌지역의 과수나무도 점령군에 의해 마구 베어졌다. 페르시아 대군이 아티카 지역을 폐허로 만든 전쟁의 상처는 전후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회복될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했다.

그나마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시키고, 살라미스 해협에서 해전으로 결판을 내고자 했지만, 이 과정 또한 순탄치는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가 180척의 아테네 함정을 이끌며 368척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연합함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 실질적인 지휘권이 주어졌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선 전력의 빅3는 아테네와 30척을 보낸 아이기나, 50척을 보낸 코린트였다. 스파르타는 겨우 16척이 참전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응당 전력의 절반에 상당하는 함선을 투입한 아테네가 해군총사령관을 맡아야 옳았다.

아이기나 섬이다. 아테네에서 여객선으로 50분 거리에 있다.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초까지 그리스에서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였다. 오늘날에는 아테네와 피레우스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대형 크루즈와 요트가 즐비한 관광지이다. ⓒ박경귀

하지만 아테네는 이미 전 국토를 내주고 해군의 전투에 국가 존망을 걸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궁박한 상황에 처한 아테네를 그리스 연합군의 다른 나라 지휘관들은 업신여겼다. 해군총사령관은 불과 함선 16척을 갖고 참전한 스파르타에 돌아갔다. 아테네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되는 전력을 가진 스파르타에게 지휘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아테네로서는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원통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테미스토클레스가 해군총사령관을 맡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도시와 스파르타의 주장에 따라 테미스토클레스를 제키고 스파르타의 장군 에우리비아데스가 해군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적 결단도 한몫 했다. 그는 스파르타와 다른 국가들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아테네의 자존심은 내세우거나 개인적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았던 것이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총사령관이 되지 못한다 해도 해군의 절대적 전력을 갖춘 아테네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총사령관직을 맡은 에우리비아데스가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여러 나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합의를 도출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로 인해 그리스 연합 함대의 지휘관들 사이에서 살라미스 해협을 버리고 코린토스 지협으로 물러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이는 살라미스 해협을 지켜내고 이를 발판으로 아티카를 수복하려는 복심을 가진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심하게 말해 스파르타나 코린토스와 펠로폰네소스 국가들에게는 아테네가 멸망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더 화급한 것은 자신들 조국의 안위를 지켜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살라미스 섬과 아티카를 포기하려는 그들의 생각을 마냥 원망할 수만도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비록 아테네의 해군 함선 180척이 있다 해도 만약 다른 그리스 함선이 모두 코린토스 지협으로 철수한다면 아테네만의 독자 작전으로 700여척이 넘는 페르시아 대함대를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테네로서는 어떻게 하든 그리스 함대를 묶어 합동전을 펼쳐야만 했던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적은 함선으로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맞아 싸우려면 바다 폭이 좁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총사령관의 지휘권을 갖지 못한 그의 발언은 무시되었다. 그리스 함대의 여러 나라의 지휘관들은 코린트 지협으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겠다는 것은 해전에서 불리할 듯싶으면 상륙하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육전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막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하는 길목인 코린트 지협에 방벽을 쌓은 것도 이런 작전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살라미스 해협의 코앞에 있는 아테네와 메가라, 그리고 아이기나인들은 살라미스에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곳을 내주면 아테네와 메가라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섬나라 아이기나는 페르시아 함대에 포위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작전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총사령관인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는 지휘부의 이러한 분열과 갈등을 조정해내지 못했다.

이때 테미스토클레스의 기지가 빛을 발했다. 그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총사령관인 에우리비아데스에게 애원 겸 협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이곳에 머물러 남아(男兒)가 되어준다면 일이 잘 풀릴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헬라스를 완전히 망하게 할 것이오. 이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함대에 달려 있소. 그대는 내가 권하는 대로 하시오. 그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가족들을 모은 다음 배에 태우고 이탈리아의 시리스로 갈 것이오.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것이고, 그곳은 아테나이인들의 식민시가 될 운명이라는 예언들도 있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우리 같은 동맹군을 잃고 나면 그때는 내 말이 생각날 것이오.”

테미스토클레스의 설득은 먹혀들었다. 에우리비아데스는 살라미스에서 결전을 벌이자는 의견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다. 코린트와 스파르타를 위시한 여러 나라 지휘관들은 살라미스를 빠져나갈 궁리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결전지를 살라미스로 확실하게 못 박기 위해 고도의 교란작전을 편다. 그는 페르시아 군영으로 자신의 시종을 보냈다. 자신이 페르시아 대함대의 위력에 눌려 패배할 경우를 대비하여 내통하고자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면서 그리스 함대들이 도망치려 하니 퇴로를 차단하고 추격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다. 페르시아 진영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살 길을 찾기 위해 페르시아 대왕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곧 그리스 함대를 포위하여 섬멸하는 작전을 준비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교란작전이 먹혀들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아리스테이데스가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몇 년 전에 자신이 사주하여 아테네인들이 도편 추방했던 정치인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늘 정의로운 사람으로 칭송을 받던 사람이지만 테미스토클레스와의 정치적 대결에서 패배하여 해외로 쫓겨나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가 침략하자 총체적인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를 사면하여 귀국시켰고, 이 전쟁에도 참전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10년 전 마라톤 전투에서 테미스토클레스와 함께 자신이 속한 부족의 지휘를 맡아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이기도 했다.

자신을 추방했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증오심을 가졌을 법한 아리스테이데스였지만, 그는 사원(私怨)을 접어두고 테미스토클레스를 찾아와 그리스 함대에게 전략적 조언을 했다. 국가를 구하는 대의 앞에서 그는 주저 없이 정적의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 우리는 다투되 우리 둘 중 누가 조국에 더 많이 기여하는가를 두고 다투어야 할 것이오. 지금 그대에게 말해두고 싶은 것은,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이곳에서 출항하는 문제에 관해 말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매일반이라는 것이오. 코린토스인들과 에우리비아데스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소. 적에게 우리는 완전하게 포위되었기 때문이오. 그대는 회의장으로 돌아가 이 소식을 전하시오.”

페르시아 함대의 동향을 아리스테이데스가 재빨리 파악하여 알려 준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이 페르시아 진영에 보낸 간첩을 통한 교란 작전이 먹혀든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의 그런 행동은 내가 사주한 것이오. 헬라스인들이 자진하여 싸우려 하지 않아, 싫다는 그들을 나는 억지로라도 싸우도록 강요할 수밖에 없었소. 그대는 이런 좋은 소식을 가져왔으니 그대가 직접 그들에게 전하도록 하시오. 내가 전하면 그들은 거짓말하는 줄 알고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오.”

아리스테이데스는 그리스 함대가 이미 포위되었으니 적군과 싸울 것을 설득했지만 장군들은 대부분 이 소식을 믿지 않고 갑론을박했다. 그 와중에 페르시아 함선 1척이 탈주해 와 아리스테이데스가 전한 소식을 재확인해주자 그 때서야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스 함대가 결전에 나서도록 아리스테이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가 긴밀히 협력하고 역할 분담을 하여 그리스 지휘부를 설득한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거둔 셈이다.

일단 싸우기로 결정하자 전투를 주장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상황을 주도하게 되었다. 기원전 480년 9월 25일 새벽이었다. 그리스 함대 지휘관들은 어둠 속에서 회합을 갖고 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연설을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인간 본성과 기질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대비시키며 그들에게 좋은 면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승선을 명령했다.

페르시아 함대에 대한 공격에서 아이기나인들과 아테네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스 함대의 기본 전술은 삼단노선의 앞에 달린 청동의 충각을 이용한 충파 작전이었다. 좁은 해협에서 많은 함선을 투입한 페르시아 함대가 서로 얽혀 좌충우돌했다. 그 상황을 이용하여 그리스 함선은 페르시아 함선의 뒤나 옆구리를 충각으로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전투를 관전했다는 아이갈레오스 언덕에서 바라본 살라미스 해협의 모습 ⓒ박경귀

살라미스 해전의 전투 상황도이다. 붉은 색이 페르시아 함대, 청색이 그리스 연합 함대이다. 페르시아 함대가 사로닉 만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살라미스의 좁은 해협에서 그리스 연합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가 대치한 형국이다. 미국 군사 아카데미 2014년 작

그리스 함선들의 공격에 부서지고 침몰하는 페르시아 함선과 바다에 빠져 죽는 페르시아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은 그리스의 영웅의 영혼들이 그리스 군을 응원하는 모습이다. ‘살라미스 해전’, Wilhelm von Kaulbach (1805·1874)의 1868년 작, 뮌헨 막시밀리안 박물관

살라미스 섬 쪽으로 선수(船首)를 두고 상선들이 연결된 채 정박해 있다. 잠시 페르시아의 대함대가 살라미스 섬을 에워싸며 전진해 오는 상상의 모습과 중첩되어 보였다. ⓒ박경귀

삼단노선의 부조, 기원전 410~400년 작, 아테네 신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충파 작전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노잡이들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전속력으로 돌진했다가 적의 함선에 박힌 충각을 빼내기 위해 다시 급격히 후진하는 노를 젓는 기술은 고도의 기술과 힘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가는 적선에 충각이 박혀 한데 엉킨 채 적병의 공격을 받을 경우 괴멸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함상의 전투병 못지않게 노잡이의 역할은 충파 작전 전개에 결정적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8년 후인 기원전 472년에 공연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비극 작품 ‘페르시아인들’에는 살라미스 해전의 전투 상황이 잘 묘사되었다. 페르시아의 전령이 페르시아의 궁전으로 돌아가 크세르크세스의 모후 아톳사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살라미스 섬의 해안들과 그 인근 지역은
비명횡사한 자들의 시신으로 가득하옵니다.“

“활은 아무 쓸모가 없었사옵니다. 군대가
함선들의 충각에 제압되어 전멸했사옵니다.“

“헬라스 함선 한 척이 먼저 들이받기 시작하여
포이니케 함선 한 척이 고물 장식을 완전히
박살내자, 함선들끼리 서로 돌진했사옵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 군대의 내닫던 기세가 충격을
견뎌냈사옵니다. 그러나 수많은 함선들이 해협에서
정체되자, 서로 도와준다는 것은 불가능했사옵니다.

페르시아의 함선들은 아군의 청동 충각에 맞아
노들이 모두 산산이 부러져버렸사옵니다.
한편 헬라스인들의 함선들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페르시아 함대를 포위하더니 사방에서 공격했사옵니다.“


함선이 접선되면 백병전이 벌어졌다. 대부분 헤엄을 칠 줄 몰랐던 페르시아인들은 배가 침몰하면서 대부분 바다에 빠져 죽었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살라미스 맞은편 아이갈레오스 언덕의 기슭에 앉아 이 역사적인 해전을 관전하면서 두각을 나타내는 부하들을 체크했다. 대왕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 함대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페르시아 함대의 상당수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달아나 팔레론 항구로 달아났다.

살라미스 섬에 조성된 해전 기념물이다. 맞은편에서 공격해 오는 페르시아 함대를 향해 그리스 전사가 창과 활을 겨눈 모습이다. ⓒ박경귀

살라미스 해협의 선상에서 바라본 크세르크세스가 전투를 관전했다는 아이갈레오스 언덕의 모습이다. 여객선이 정박해 있는 페라마 항구의 뒤편 낮은 언덕이다. 지금은 모두 주거지역으로 변했다. ⓒ박경귀

한편 아리스테이데스는 페르시아군이 점령했던 살라미스 해협의 입구에 있는 프시탈레이아 섬에 상륙하여 주둔하고 있던 페르시아인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페르시아 군은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이 작은 섬을 선점했었다. 이는 살라미스 해협을 보다 완전하게 포위하고 전투에서 밀려나 섬으로 오르는 아군을 구하는 한편, 그리스군을 도륙하기 위해 것이었다.

살라미스 해협의 입구 쪽에 있는 프시탈레이아 섬(바깥쪽)과 좁고 길게 뻗은 키노수라 반도(안쪽)의 모습

이 섬을 장악하고, 길게 뻗은 살라미스 섬의 키노수라 반도와 본토 사이의 약 2km에 이르는 좁은 해협을 선교(船橋)로 연결할 경우 살라미스 섬과 해협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전한 ‘바키스의 신탁’의 내용에도 이런 작전을 예언한 듯한 대목이 나온다. 이 신탁은 아테네가 함락되고 유린을 당한 후에 종국에는 승리할 것을 예측하고 있다는 점에서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전의 전략을 옹호하기 위해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신탁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기는 하다.

“그들이 자랑스러운 아테나이를 함락하고 나서 광기 어린
희망에 들떠 황금 칼을 차신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해안과
바다로 둘러싸인 키노수라 섬을 선교(船橋)로 연결한다면,
고귀하신 정의의 여신께서 교만의 아들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고 광란하는 강력한 포만(飽滿)을 제압하시리라.
청동이 청동과 맞부딪치고, 아레스가 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일 테니까. 그 때는 멀리 보시는 제우스와
고귀한 승리의 여신에 의해 헬라스에 자유의 날이 밝아 오리라.“


페르시아 함대의 패전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던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분개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그는 흙과 돌덩어리를 산처럼 모아 바다에 던져 해협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해협을 완전히 메우고 그 위에 제방을 쌓은 후 육군을 살라미스 섬으로 진격시켜 아테네인들의 씨를 말려 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대로 실행되지는 못한 것 같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럽으로 넘어오기 위해 가설했던 헬로스폰토스의 다리가 해체될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서둘렀다. 살라미스 해전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대로 좁은 바다에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을 통해 그리스 연합함대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아테네 역사상 해전에서 거둔 최초, 최대의 영광스런 승리였다.

물론 700여척의 페르시아 함선 중 상당수는 해협 안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함대가 완벽하게 괴멸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페르시아가 더 이상 해전에서의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충격적인 패배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에 기여한 전술적 요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배리 스트라우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두 가지 요소를 들고 있다. 첫째, 코린트인들이 페르시아 군을 속이기 위해 거짓 도주하여 페르시아 함선을 해협 깊숙이 유인한 후 다시 기습 공격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코린트인들이 도주했다는 설과, 용감하게 싸웠다는 설을 함께 제시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가설인 듯하다.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두 번째는 테미스토클레스가 바람을 이용한 전략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견해다. 여명이 밝아오는 두 시간 내에 살라미스 해협에 불어오는 해풍 ‘아우라’의 특성을 잘 알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를 잘 이용했다는 것이다. 좁은 해협에서 바람이 강해질 경우 페르시아의 함대가 풍랑에 요동쳐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간파했다는 의미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열전’을 보면,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협의 지형과 풍향을 교묘하게 활용했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페르시아 함대는 높은 파도로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해협이 좁아 700여척의 배를 횡렬로 전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제대로 대열을 갖추지 못하는 페르시아 함선의 주위를 선회하며 그리스 함대는 적선의 뒤쪽 이물이나 옆을 들이받는 방식으로 공격했을 것이다. 그리스군의 청동 충각을 단 삼단노선은 ‘떠다니는 전차’와 같이 적선을 분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살라미스 승전의 결정적 요인을 보태고 싶다. 아테네군을 비롯한 그리스군의 필승의 신념과 충천한 사기가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아테네는 이미 전 국토를 내주고 시민들은 모두 살라미스 섬이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트로이젠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마저 잃을 경우 그들은 갈 곳이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페르시아군을 물리치지 않으면 자유도 나라도 없는 상황이 아테네 병사들에게 필승의 일념을 굳건히 하게 하지 않았을까.

아테네인들은 해전에 집중하기 위해 중장보병과 기마병도 모두 무구를 내려놓고 노잡이가 되거나, 함선의 전투에 맞는 전투 장비와 전법을 새로이 익혀야 했을 것이다. 숱한 시민들이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노를 잡고 손이 터지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능숙한 수병이 되어갔을 것이다. 재산이 없어서 무구를 자기 돈으로 구할 수 없었던 사람도 해군에서는 쓸모 있는 노잡이와 키잡이가 될 수 있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아테네인들의 계층을 확장시켰다. 부족한 수병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과 노예의 일부도 노잡이가 되었다. 이들의 땀과 피가 아테네를 구한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가 명실상부한 해상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페니키아가 해상제국의 위상을 공고히 갖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함대는 실상 이 페니키아 정예군이 주력군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패배는 곧 페니키아가 주도하던 에게 해의 해상 패권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수십 년 동안 사로니코스만을 지배해왔던 아이기나 해군의 영향력도 일거에 뒤엎는 계기가 되었다. 아테네는 아이기나의 해군력에 눌려 그동안 바다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테네를 수복시킨 수병들은 새로운 아테네를 만들어가는 노정에서 그 공로에 버금하는 대우를 받을 만 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가난한 노잡이들이 아테네를 부활시킨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아테네 민주주의가 한 차원 더 높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의 황금기를 만든 초석이 되었다. 세계 4대 해전으로 불릴 만큼 세계 역사를 바꾼 역사적인 해전이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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