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 탔다...방송이 들렸다...눈물이 나왔다
지친 일상의 작은 위로 '훈훈 방송' 기관사들 "고객들과 소통하고 싶었어요"
2015년 1월 칼바람이 불던 날. 계속되는 취업 실패에 지쳐가던 장그래 씨(가명·27)는 어김없이 서울의 유명 어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마침 이날은 몇 주 전 지원한 한 회사의 신입사원 서류전형 합격 여부가 통보되는 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착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내용은 ‘불합격’이라는 통보였다. 서류조차 통과되지 않는 팍팍한 취업난에 장 씨의 어깨는 한없이 쳐졌다. 바로 그 때 지하철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힘내세요! 올해는 더할 나위 없는 취업의 문이 열릴 겁니다." 지하철 기관사가 던진 한마디에 그나마 장 씨는 옅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지하철 기관사의 ‘훈훈’한 방송이 지치고 힘든 나날을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 딱딱한 안내방송 대신 감성을 자극하는 따뜻한 글귀와 즐거운 유머가 지하철 객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면서 지하철 이용 고객들의 만족도를 상승시키고 있다.
지난 7월 22일 서울시 ‘칭찬합시다’ 게시판에 ‘서울도시철도공사 5호선 이영우 기관사님을 칭찬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의 작성자는 “오늘 아침 5호선을 기분 좋게 이용해 칭찬글을 올리고 싶어 서울도시철도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칭찬게시판이 따로 없어 여기다 글을 남긴다”며 “더운 날씨지만 좋은 하루 되라는 이영우 기관사님의 방송 덕에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됐다”고 적었다.
칭찬의 주인공 이영우 기관사(39)는 지난 2003년 서울지하철 5, 6, 7, 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입사했다. 입사 이후 9년간 차량을 정비하는 차량직으로 근무하다 2012년부터 차량을 운행하는 승무직으로 전직해 일하던 중 우연히 선배 기관사의 ‘행복방송’을 듣게 됐다.
서울도시철도공사는 기관사가 직접 고객들에게 시를 읊어주거나 명언을 읽어주는 방송을 ‘행복방송’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행복을 전하는 방송이라는 의미다.
선배 기관사의 행복방송을 직접 들은 이 기관사는 즐겁게 일해보자는 취지에서 용기를 내 행복방송을 시작했다. 좋은 글귀를 발견할 때마다 메모지에 적었고 하나씩 꺼내 방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끄럽다’, ‘조용히 가고 싶다’며 불평하는 고객들이 있어 위축되기도 했지만 그는 계속 행복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깜깜한 터널 속 홀로 기관실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환경 속에서도 고객과 소통하고 마음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그러다보니 SNS나 서울도시철도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에 하나둘씩 칭찬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부 고객들은 하차 후 기관실로 달려와 이 기관사에게 감사인사를 하기도 했다. 실제 충정로역에서 내린 한 남성은 기관실 옆으로 허겁지겁 뛰어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방송 좋았다"고 웃어보였고 일부는 주머니 속 사탕을 건네기도 했다. 심지어는 먹던 보약까지 챙겨주는 승객도 있었다.
특히 올해 초 대학 입시와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취업문이 열리고 원하는 대학에도 입학하는 좋은 한해가 되길 바란다’는 방송을 했을 때는 SNS 등 온라인에서 칭찬과 감사의 글이 연달아 올라오기도 했다.
이 기관사는 ‘데일리안’에 “나 역시 출퇴근을 할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어떻게 보면 한 명의 고객으로서 기관사가 위로해주는 말을 하면 힘이 되더라”라며 “열차를 이용하는 분들 중에는 정말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들도 있을 텐데 짧은 글귀로 작은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방송 멘트를 짜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고 정말 고민도 많이 한다”며 “요즘 대부분의 승객들이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계속 꽂고 있어 내 방송을 들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가끔 고맙다고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방송을 계속 하게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지하에서 운전하다보니 때로는 힘들기도 한데 잠시나마 방송을 통해서 고객과 공감하면 스스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며 “앞으로 더 열심히 행복방송을 해 많은 분들에게 행복을 전달하는 기관사가 되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한편 서울메트로는 현재 회사 내부적으로 자사 기관사들에게 ‘감성방송’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객들에게 한발 더 다가서자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관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오는 불만 민원에 감성방송을 주저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가운데서도 신청하 부기관사(35)는 용기를 내 고객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을 패러디해 승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회사 권유에 감성방송을 시작했지만, 그의 방송을 들은 승객들이 기분 좋은 반응을 보내오면서 스스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방송하고 있다는 게 신 부기관사의 말이다.
그는 명언이나 감동적인 글귀보다는 주로 노래나 유머를 섞은 방송을 내보내 승객들의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창밖을 보라’라는 노래를 개사해 부르면서 “한정거장을 지날 때만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셔도 좋습니다”라고 방송해 큰 호응을 받았다.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착안해 ‘Let it Be’ 멜로디에 기관사들의 애환을 담아 노래를 불렀을 때는 승객들로부터 “신선하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반복되는 근무에 지치기도 하고 홀로 동떨어져 기관실에 있으면서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감성방송을 통해 고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물론 스스로 직업 생활에 만족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신 부기관사는 본보에 “기관사라고 하면 대부분 그냥 운전사라고만 생각하시는데, 고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도 수송서비스에 모두 포함되는 일”이라며 “운전실에 가만히 있으면 타성에 젖을 때가 많은데 방송을 하면 고객을 즐겁게 해줄 수도 있고 자기만족도 된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사실 승객들에게 민원을 상당히 많이 받아서 안내방송을 한번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지고 조금 소심해지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그래도 감성방송을 하면서 승객들이 직접 제 얼굴을 확인하러 와서 웃어주시는 걸 보면서 용기를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 부기관사는 “아직도 ‘기관사는 안전운전만 하면 돼’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고객을 웃게 해주는 일도 우리가 할 일이니까 색안경을 끼고 보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며 작은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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