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에도 '새로운 보수' 지향하는 묵묵한 흐름 있다
<칼럼>대통령뿐 아니라 쓴소리 못한 친박도 퇴장해야
새로운 보수는 진보와 함께 정치의 한 축 담당해야
세계에서 체계적인 탄핵제도를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는 영국이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탄핵은 영국 의회가 14세기 후반 당시의 정치적 실세인 래티머 남작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19세기 내각불신임권이 생기면서 유명무실해질 때까지 약 5백년간 지속된 영국의 탄핵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에드먼드 버크가 인도 식민지 초대 총독을 지냈던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한 사건이다. 헤이스팅스가 총독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의 법적 자유와 사유재산 등 권리를 유린했다는 이유였다. 1788년 2월에 하원의원 버크의 유명한 연설로 시작된 탄핵심판은 약탈, 수뢰, 매관매직 등 모두 20개 항목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진행됐다. 그러나 무려 7년 2개월이 걸린 이 재판에서 헤이스팅스는 상원에서 모든 항목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음으로써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가장 길었던 정치적 재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보수주의자 버크가 헤이스팅스를 인도인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한 범죄자로 보고 그를 정치적으로 탄핵하려 했다는 것이지 탄핵심판 절차가 정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헤이스팅스에 대한 탄핵심판은 여론에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나 대체로 ‘법률적’ 심판이었다.
영미법 계통 의회, 입법기능뿐 아니라 사법적 '탄핵심판권' 보유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른바 영국이나 미국 등 영미법 계통의 의회 기능이 입법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영국 상원을 제외하면 의회 의원들이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등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탄핵 등 모든 기능을 ‘정치적’으로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영국과 미국 의회의 역사적 성격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영국 의회를 보자. 영국 의회의 핵심기능이 입법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의회를 통과한 법안들의 상당부분은 사적(私的) 법안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특정한 지역, 회사, 개인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에 대한 최종적인 사법적 해결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의회는 사권박탈법안(Bill of Attainder)을 통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범죄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지위와 재산을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고위공직자에 대한 탄핵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2009년 10월까지는 상원의 법률위원회가 대법원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는 영국 의회가 입법 기능뿐 아니라 최고재판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탄핵심판은 '정치적' 아닌 '법률적' 심판…여론 영향 받지 않아
미국 의회도 사권박탈법 등은 제외되었지만 영국 의회의 이러한 사법적 전통을 상당 부분 물려받았다.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을 선언한 미국은 1776년 버지니아 주와 1780년 메사추세츠 주의 헌법을 필두로 의회가 고위공직자의 탄핵심판을 담당하는 것으로 규정했고, 마침내 연방 헌법에서 삼권분립에 기초한 대통령제를 도입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하원이, 심판은 상원이 담당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 때문에 건국 이후 두 차례 진행된 미국의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미국 상원은 영국 하원이 헤이스팅스 재판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론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심판을 ‘법률적’으로 진행했던 것이다. 의회의 사법적 기능이 없었던 대륙법 계통의 유럽 국가들이 탄핵 기능을 대부분 의회가 아닌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 맡기고 있는 것은 탄핵이 ‘정치적’ 심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탄핵보다는 정치적 부담과 불확실성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정치권이 찾아냈으면 모르겠지만, 기왕에 탄핵으로 방향을 잡은 이상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가결된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차라리 다행이다. 부결되었을 경우 격앙된 민심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 있고 정치일정도 오리무중이다. 이참에 탄핵절차와 상관없이 대통령을 즉각 끌어내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대통령이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지 않는 한 법치주의에 반하는 일이다. 탄핵이 소추된 이상 결국 이제 모든 것은 헌법재판소의 손에 달렸다.
일각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정치적으로’ 대응해 줄 것을 기대하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압력을 가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국민 절대다수가 탄핵을 원하고 있고, 그것은 촛불민심으로 입증됐으며, 더구나 민의의 대변기관인 국회에서 소추안이 압도적 다수로 가결됐으니 그 뜻에 따라 조기에 탄핵안을 인용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심판은 우리의 헌법정신에도 맞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헌재가 ‘법률적’ 심판을 기조로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의 관리자인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에 의해 권력을 부여 받지 못한 민간인이자 측근에게 대통령의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도록, 또는 그렇게 하도록 방치한 것이 이미 확실해진 이상 탄핵을 부결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 다만 헌법재판소가 기본적인 자료 검토를 조속하게 끝내고 심판일정을 공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야지만 정치 일정이 가시권 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뿐 아니라 쓴소리 못한 친박도 퇴장해야 한다
탄핵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은 완전히 바닥났다. 만의 하나 그럴 가능성이 희박해보이지만 헌재에서 부결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국민의 뜻이다. 이른바 보수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퇴장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뿐이 아니다. 쓴소리 하나 하지 못하고 그를 무조건 추종한 이른바 친박은 물론, 이제 와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얄팍한 정치꾼들도 모두 다 청소의 대상이다. 이제 새누리당은 마땅히 해산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인 보수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의 껍데기만 걸친 채 특정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재벌과 유착하여 극히 소수의 이익만 옹호해 왔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장황하게 영국과 미국 의회의 사법적 기능과 탄핵의 ‘법률적’ 성격을 이야기한 것은 탄핵정국에서 초법적, 초헌법적 주장들이 봇물을 이루면서 보수주의의 가치를 크게 위협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적어도 21세기 한국 정치에서 보수주의는 진보와 함께 정치의 한축을 담당해야 할 시대적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에도 '새로운 보수' '건강한 보수' 지향하는 묵묵한 흐름 있다
보수주의는 전통적 가치를 보존하고 사회 체제의 안정적이고 점진적인 발전을 추구한다. 상대적으로 급격한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진보주의에 대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전통적 가치는 보수주의의 원류인 영국의 역사적 전통에서 형성된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가치를 말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경우 이를 근대화 이전의 유교적 가치나 전통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넓은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다. 경제적으로는 시장을 중시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이고, 정치적으로는 다수 결정에 승복하기는 하지만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다. 보수주의는 또한 헌법의 기본정신과 법률적 절차를 중시하며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사에서 보수를 대변한다는 정당들은 ‘반공’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유린한 역사가 있고, 특정 인물들에 의한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으며, 국민보다는 재벌의 경제적 이익에 봉사한 전력이 있다. 이번에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와 대통령 탄핵 정국은 이러한 거짓 보수가 판을 쳤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이다. 이른바 진보 측의 독무대였던 촛불집회에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해 왔던 국민들(이들은 이른바 보수단체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이 대거 참여한 것은 새로운 보수, 건강한 보수를 지향하는 묵묵한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당이 나타나야할 근본적인 까닭이다.
글/허구생 단국대 교수·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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