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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정치'의 유혹, 사라진 '도편추방제'를 기억하라


입력 2017.01.16 10:00 수정 2017.10.16 10:02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수로서 상대방 압도하면 수로서 압도당할 것

자신이 주도하는 집회의 정당성만 역설하는건 독선

지난 12월 31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의 송박영신' 10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클레이스테네스(BC 570?~BC 508?)는 ‘아테네 민주제의 진정한 창설자’로 불린다.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투스(Peisistratus, BC 600 ?~BC 527)의 사후 두 아들 아들 히피아스(Hippias)와 히파르쿠스(Hipparchus)가 뒤를 이었다. 510년 망명 귀족들이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히파르쿠스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나 2년 후인 508년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들 세력을 타도했다.

그는 급진적 행정 개혁자였다. 그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아테네 민주정의 기초를 다졌다. 대표적인 것이 귀족적 권력의 토대가 되었던 4부족제를 혁파하고, 전국에 산재한 데모스들로 구성된 10부족제로 바꾸었다. 데모스는 근대의 말단 행정단위 같은 것으로, 행정자치권을 행사했으며 구성원들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부여했다. 데모스 중심의 민주정이 이로써 확립된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가운데 또 하나 괄목할 만한 것이 도편추방제( Ostrakismos)였다. 독재자가 될 것으로 의심되는 정치인을 10년간 나라에서 추방하는 제도로 BC 487년 히파르쿠스가 처음으로 추방되었다. 이 제도는 아르고스에서도 실시되었고, 시라쿠사에서는 같은 목적의 엽편추방제(Petalismos)가 시행되었는데, 야심가들의 과욕을 꺾음으로써 민주정치의 안정에 기여했다.

아테네의 경우 매년 1~2월 중 정기 민회에서 그해에 도편추방을 실시할 지를 결정했다. 실시 결정이 나면 투표는 2개월 안에 행해졌다. 두 달이나 여유를 둔 것은 군중심리에 의한 졸속 결정을 방지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숙고의 시간을 가지게 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허점은 있게 마련이다. 도편추방제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세월이 가면서 이 제도는 정적 제거용으로 악용되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황금시대를 이끈 페리클레스도 30년간 집권하는 동안 이 제도를 별로 선하지 않은 목적으로 이용하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투표자의 책임의식 결여나 이해 부족으로 인해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는 예도 없지 않았다.

아리스티데스 추방에 대한 표결이 있던 날이었다. 민회에 나온 어느 농부가 옆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은 글씨를 쓸 줄 모른다며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도편에 써달라는 것이었다. 부탁을 받은 사람이 물었다.

“그가 당신에게 나쁜 일을 저지르기라도 했나요?”
“아니오. 나는 사실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는 몰라요. 다만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송해대는 게 짜증이 난단 말이지요.”

도자기 파편에 추방 대상자 이름을 대신 써준 사람은 바로 아리스티데스였다.

제도의 본뜻이 왜곡되면서 정치적으로 악용되자 시민들 사이에 그 폐해를 지적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기원전 416년(?)의 히페르볼루스 추방을 끝으로 도편추방은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광장민주주의가 반드시 선한 결과만을 낳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더욱이 분노한 군중에게서는 이성적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다.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대통령은 물론 국회까지 압도해 버렸다. 대중매체인 언론들의 집요한 폭로와 공격 역시 구조적 측면에서 촛불집회와 맥락을 같이 한다. 주최 측의 주장이긴 했지만 100만, 200만이 운집한 정치투쟁성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고대 아테네의 민회의 모범적 재현이라고 할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자 한다. 지금에 와서 검찰, 특검, 국회 등이 냉철한 이성으로 사안을 인식 분석 판단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코미디가 되기 십상이다. 촛불집회의 규모와 그 함성에 많든 적든 압도되었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그들도 인간일 것이므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국민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출하고, 그 바라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하는 것이야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입법과 사법의 과정이 그 함성 속에서 진행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검찰이 대통령을 ‘공범’으로 한 최순실 공소장을 세상에 공표한 것이나, 야당들은 물론 여당의 일부 의원들까지 합세해 국회에서 급급히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것이나 너무 숨 가쁘게 진행된 징벌과정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특히 ‘국회의원의 군중화’는 우리 대의민주정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차갑게 식힌 머리로 판단했노라고 이구동성으로 소리 지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박 대통령에 대해 그간 쌓인 불신 불만 불쾌감 거부감 따위가 거대한 촛불집회에 추동되어 분출되었다고 하는 게 더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심리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개인으로서의 느낌을 뿐이라는 점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어쨌든 근대적 대의민주정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진지하고 이성적인 대의원들이 광장정치의 무비판적 집단동조의 위험성을 피하면서 민주적 논의 및 결정과정을 구현해 주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이른바 ‘87년 체제’하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의사당 내의 군중’ 수준을 별로 넘어서지 못했다. (2012년 이전의 의사당 풍경이지만) 소리 지르고 완력 과시하는 점에서는 거리의 시위대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국회 선진화법으로 국회 내 폭력 폭언은 거의 사라졌다고 하나 대신 정부 기능을 정지시킬 정도의 엉뚱한 괴력이 과시되기 시작했다. 상임위 재적위원 5분의 3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떤 법안도 처리될 수 없고, 당연히 본회의 상정도 불가능하다. 이때부터 국회는 사실상 야당 장악 하에 들어갔다. 87년 제9차 개헌 이후 대통령의 권력이 위축되는 동안 정당, 그 중에서도 야당의 권력은 팽창 일로를 질주해 온 것이다.

이제 국가운영체계에 포함돼 있는 모든 조직과 사람들은 광장을 떠나 자신의 정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촛불민심’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국정운영의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흥분과 분노를 넘어 이성과 지성의 힘으로 국가경영을 고민할 때라고 믿는다.

수로서 상대를 압도하면 다음번엔 수에 압도당할 수 있다. 촛불집회에 맞서 태극기 집회가 기세를 올리는 이즈음이다. 양측 공히 ‘민의’를 내세우고 정당성을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두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주도하거나 참여하고 있는 집회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독선일 수밖에 없다.

일련의 촛불집회를 통해 현 정부가 붕괴되고 그 자리를 야권의 정치인들이 차지할 수 있다고 하자. 분노하는 군중이 지금의 야권에만 있지는 않다. 태극기집회가 보여주는 게 그것이다. 광장정치가 정부를 무너뜨리게 되면 이후 어떤 정부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보수세력도 진보 측 촛불집회로부터 분노하고, 뭉치고, 외치고, 저항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웠다. 당연히 기회나 계기가 생길 때마다 그 실력을 과시하고자 할 것이다.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사법적 판단의 절차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광장에서 무리지어 ‘퇴진’ 압박을 가하는 것은 법치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촛불민심도 태극기민심도 이미 충분히 표출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민주적 절차를 통한 문제 해결과정을 주권자로서 지켜볼 일이다.

특히 유력 대선주자라는 분들은 ‘촛불혁명’의 유혹에 휘둘려 선동적 언어를 쏟아놓을 것이 아니라 진실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발전을 지속시킬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옳다. 선동의 힘으로 정권을 잡으면 선동 때문에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003년 5월 2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5‧18행사 추진위원회 간부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탄식조로 말했다.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과 위기감이 든다.”

그 ‘전부’가 보수세력이었을까? 천만에! 그는 취임 직후부터 자신의 편이던 진보세력의 끊임없는 불평과 요구에 지쳐 갔다. 그가 명명했던 ‘시민혁명’ 세력이 공격의 선두에 섰음을 야권의 주자라는 분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군중의 힘에 의해 정권을 장악할 경우, 가장 먼저, 가장 험한 표정으로 차용증서를 내밀며 빚 갚기를 독촉할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지지자들일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과연 ‘촛불혁명’이니 ‘시민혁명’이니 하는 것에 솔깃해 질 수 있을까?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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