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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세종대왕 폄하의 문제가 아니다


입력 2019.08.01 08:00 수정 2019.08.01 07:24        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이슈분석> 사료 뒷받침되지 않아 감독 ‘뇌피셜’ 과하게 진지

<하재근의 이슈분석> 사료 뒷받침되지 않아 감독 ‘뇌피셜’ 과하게 진지

영화포스터ⓒ데일리안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문제로 비난이 잇따르자 감독은 ‘세종대왕을 폄훼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비난당하는 이유가 세종대왕 폄하에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여러 매체에서 세종대왕 폄하가 이 영화의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이라는 ‘성역’을 건드렸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나랏말싸미’의 가장 큰 문제는 세종대왕 폄하가 아니다. 한글 폄하가 문제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인류 역사상 유래가 드문 창작문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글을 산스크리트어의 아류처럼 그렸다. 산스크리트어가 모든 소리 문자의 원형이라는 식의 대사도 나온다.

한글의 진정한 제작자인 것처럼 등장하는 신미 스님 캐릭터가 바로 산스크리트어 능통자이다. 신미를 통해 한글이 조선의 순수 창작품이 아닌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 문화 전통의 산물인 것처럼 인식된다. 이러면 한글이 조선 성리학처럼 된다. 조선 성리학이 높은 경지에 다다르긴 했지만 중국의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었다. 한글도 산스크리트어 및 거기에서 비롯된 파스파 문자, 티베트 문자 등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된다.

이러니 한글 폄하인 것이다. 물론 기존의 믿음을 깨고 위상에 흠집을 냈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애국주의 때문에 모두가 외면하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것이라면 오히려 찬사를 보내야 마땅하다.

‘나랏말싸미’의 문제는 역사적 진실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우리 국사의 제1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뒤집으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

감독은 신미의 역할에 대해 김수온의 문집에 세종과 신미가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는 대목이 있고, 수양과 안평이 신미를 스승처럼 모셨으며, 세종이 신미에게 존칭을 내렸다는 등의 배경을 설명했지만 이것들은 신미가 한글을 만들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물론 세종의 문자 창제 프로젝트 당시 기존 문자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하면서 차용할 점은 차용했을 것이다. 조력자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정도 수준에서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괜찮다. 그 수준을 넘어 한글을 스님이 만든 산스크리트어 불교문화의 산물로 규정하다시피 한 게 문제다. 근거도 없이 말이다.

‘영화는 영화로 보자’고 하지만 역사 논란의 불을 지핀 게 감독 자신이다. ‘나랏말싸미는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이며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자막을 띄운 것에 대해 “넣고 싶지 않은 자막‘이었다고 한 것이다. 이건 감독이 영화를 진짜 역사로 여긴다는 인상을 줬고 당연히 관객은 그 근거를 묻게 됐다.

또 하나, 영화 초반에 신미가 세종을 만나게 된 계기가 일본승들이 조선에 몰려와 선대왕이 약속했다며 대장경 원판을 달라고 한 사건으로 그려진다. 선대왕의 약속이란 말에 조정이 대응을 못했는데, 신미가 와서 ‘대장경은 나라가 아닌 백성의 것’이란 논리로 지켜낸다. 이것은 한국이 약속을 안 지킨다는 일본의 주장에 이용될 수 있다. 공교롭게 ‘왕(국가)의 약속이 백성의 권리를 없앨 수 없다’는 논리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강제 징용 판결을 떠올리게 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 한국은 조선 때부터 비슷한 논리로 약속을 어겨왔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어쨌든, ‘광해’는 누구나 판타지라는 걸 알 수 있다. ‘관상’도 그렇다. ‘나랏말싸미’는 사료에 근거한 전통사극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 반발을 초래했다. 한글과 같은 중대한 문화유산에 대한 주류 학설을 정색을 하고 뒤집으려면 상상이 아닌 사료가 필요했다.

그런 것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는 한글에 대한 감독의 ‘뇌피셜’을 과하도록 진지하게 펼친 듯한 느낌이다. 불교의 역할이 아주 강하게 강조돼서 불교 홍보 영화 같은 느낌도 있다. 이런 것을 수출해서 외국사람들에게까지 보여줄 이유가 있을까?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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