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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원의 정치공학] 대통령제에 조종이 울렸다


입력 2020.11.15 07:00 수정 2020.11.15 05:34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승자독식 대통령제가 불러온 갈등과 반목

텃밭서 '반대파'는 의사표현조차 어려워져

대통령제 고안된 미국에서조차 '말기 증상'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당선인의 승리가 유력해진 지난 8일 민주당 아성인 워싱턴DC 주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와 '트럼프를 체포하라'는 펼침막을 펼쳐들고 행진하고 있다. 워싱턴DC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바이든 당선인이 92.4%를 득표해, 5.3% 득표에 그친 트럼프 대통령을 압도하고 3명의 선거인단을 가져갔다. ⓒAP·뉴시스

'전부 아니면 전무' 승자독식이 특징인 대통령제에 조종(弔鐘)이 울리고 있다. 대통령제를 고안한 원조 국가이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모범적으로 제도를 운영하던 미국조차 대통령제가 민주적 권력구조로서 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성숙한 승복의 문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당선자를 발표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은 연방기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패자가 '축하 전화'를 하면 승자는 그 전화를 받고나서 '당선 연설'을 하는 게 관례였다. 이러한 관례가 한 번 깨지자 급기야 대선 당선인조차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정당민주주의에서 정당은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형성·수렴·집결되는 단체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대통령제 아래에서 정당이 사생결단식 정쟁에 몰두하게 되면서, 정치는 국민통합보다 국론분열에 기여하게 됐다.


BBC의 오토 버라이어티 '탑기어'는 공화당 텃밭인 앨러배마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구호를 차량에 붙이고 다니는 '도전'을 진행했다.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주변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주유소에 정차했을 때에는 지역민들이 몰려들어 위협을 가했다. 상황은 총알이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국면까지 갔다.


반대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변호인단이 펜실베이니아 선거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주(州)의 중심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기자회견을 열려 했지만, 민주당 아성인 필라델피아에서는 아무도 트럼프 캠프 변호인단에 회견장을 대관해주지 않았다. 결국 루돌프 줄리아니 등은 필라델피아 외곽의 허름한 조경업체 주차장에서 기자회견을 해야만 했다.


특정 정당의 강세 지역에서 '정치적 반대파'는 자신의 의사표현조차 어려운 상황까지 간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칼 뢰벤슈타인은 일찌기 "대통령제는 미국의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독재와 죽음의 키스를 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미국에서조차 대통령제는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퇴임 이후 기소돼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미국의 정치학자들은 이게 대통령제의 '말기 증상'이라며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쓴웃음을 금할 수 없는 소리다. 전직 대통령이 퇴임한 뒤 기소당하는 게 대통령제의 '말기 증상'이라면,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이미 뇌사 상태를 넘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퇴임 후 기소가 '말기'라면 우리는 이미 '뇌사'
정당과 지지자들이 반목을 넘어 원한을 쌓아가
김태호 "협치와 국민통합 전제된 내각제 가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호인이자 검사 출신 공화당 정치인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지난 8일 필라델피아에서 펜실베이니아주 개표에 이의를 제기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민주당 텃밭인 필라델피아에서 공화당 캠프 관계자들에게 제대로 된 회견장을 대관해주는 곳이 없어, 줄리아니 전 시장은 시 외곽의 허름한 조경업체 사무실 주차장에서 기자회견을 해야만 했다. ⓒAP·뉴시스

역대 대통령의 사례를 살펴보면 하와이 망명, 권력 암투에 의한 암살, 백담사 유배, 첫 구속, 측근들 사법처리에 따른 충격으로 투석, 가족이 수사받자 극단적 선택, 유죄 판결과 감옥살이 등으로 퇴임 이후 편안한 대통령이 없었다. 정당과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들끼리 단순한 반목을 넘어 원한을 쌓고 있다.


정당을 출입하던 기자가 유통 분야로 발령이 났다. 홍보담당자들과 상견례를 하는데 "정당의 공보와 기업의 홍보는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다. 기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하루에도 몇 건씩 경쟁사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보도자료를 릴리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기업 홍보담당자들은 말문을 잃었다고 전한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매일 같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하루도 멀다 하고 가시 돋힌 분노의 말들을 쏟아내니, 국회의 대(代)수가 바뀔 때마다 정치문화가 경직돼가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김무성 대표가 바바리 코트를 휘날리며 새누리당에서 만든 정치참여앱을 홍보할 때, 허영일 새정치민주연합 부대변인이 "김무성 대표의 홍보 동영상이 참신해 젊은층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며 "김 대표의 홍보 동영상을 계기로 여야 모두가 선의의 경쟁을 벌이자"고 논평했던 일은 19대 국회 때 있었던 일인데, 마치 요순 시절에나 있었던 일 같다.


독일은 기민당(중도보수)·사민당(중도진보)의 양대 정당이 있고, 자민당(보수)·녹색당(진보)·좌파당(진보)의 3개 정당이 추가적으로 원내교섭단체를 형성해 연정(聯政)을 하는 체제다.


때로는 기민당과 사민당이 '대연정' 하는 경우도 있다보니, 정당 간의 혐오 조장이나 극단적인 반목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의회가 해산되고 새로 총선을 치르고나면 어느 정당과 어떻게 연립 협상을 하게 될지 모르는 정치지형 속에서 스스로만 고립될 뿐이기 때문이다.


김태호 무소속 의원은 지난달 29일 마포포럼에서 "한때 직선 중임제 대통령제를 이야기했던 것은 철학이나 철이 없었을 때"라며 "이제 협치와 국민통합이 제도적으로 전제된 의원내각제와 중대선거구제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시 총선이 가능하게끔 해서 국민 여론이 언제든 의석에 반영되는 조건으로, 이렇게 구성된 의회 내에서의 연립 협상을 통해 국민 다수의 뜻을 받드는 연정 세력이 내각을 구성하는 의원내각제로 권력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22년 대선에 도전하고자 하는 다른 대권주자들도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게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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