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번역, 읽기 편하도록 자막 구성
비문학·에세이 번역한 박상연 "명확한 정보전달"
알베르토 몬디 "한국 소설, 이탈리아어로 번역해보고파"
"영화가 조금 난해하죠? 저도 번역할 때 애 좀 먹었거든요. 이해가 잘되어야 번역도 잘 나오거든요. 뻥 조금 보태면 100번은 본 것 같아요. 감정과 관계에 따라서 번역하는 뉘앙스도 완전 달라지거든요. 신기하죠?"
현재 방송 중인 JTBC '런온‘에서 오미주(신세경 분)가 자신이 번역한 영화를 기선겸(임시완 분)과 함께 보고 난 후 한 말이다. 번역가의 일상과 고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대사다. 번역가의 일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영화 번역가 차지원 씨와 책 번역가 박상연 씨, 최근 이탈리아 동화책 ’나만의 별‘을 우리말로 번역한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비스타리, 히말라야’, ‘다른 밤’, ‘수평선’ 등을 번역한 차지원 씨는 ‘런 온’ 신세경의 대사에 공감했다. 캐나다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학교까지 졸업한 덕에 외국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나, 농담, 문화적 차이를 캐치하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이를 번역가의 눈으로 바라볼 땐 고민이 깊어진다. 차지원 씨는 “외국의 농담이나 정서가 많이 묻어난 대사들을 한국식으로 바꿔야 할지 항상 고민한다. 관객들이 봤을 때 더 즐겁고 감동적으로 볼 수 있도록 큰 그림까지 계산해야 한다”고 전했다.
차지원 씨가 번역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화면 안에 자막을 띄웠을 때 관객들이 쉽고 빠르게 읽어낼 수 있느냐였다. 차지원 씨는 “배우들의 연기, 스토리, 그리고 글까지 읽어야 하기 때문에 글자수도 계산해야 한다. 뜻의 번역도 중요하지만 자막을 놓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컷의 시간과 문장의 길이 균형을 잘 맞추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한 대사도 더 인상적으로 남기기 위해 번역가의 재량에 따라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차지원 씨는 “예를 들어 영어 대사가 ‘I KILL'이면 한국어로 ’내가 죽였어요‘가 된다. 이 때 그대로 번역하기 보단 ’죽였어요, 내가‘라는 식으로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대사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번역 의뢰가 들어오면 관객들이 이질감 없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전 정보 입수는 물론, 스크립트를 반복해서 읽는다. 보통 번역 작업은 영상 길이의 5배가 소요된다고. 차 씨는 “영화 번역가지만, 영상을 보고 번역하기보단 스크립트를 읽고 번역한다고 생각한다. 글로 영화를 보고 어떤 부분을 살릴지 정한 후 영상에 입힌 채로 반복해 본다”고 번역하는 과정을 압축해 설명했다.
영상과 함께 입혀지는 작업을 제일 신경쓰는 영화 번역가와 달리 일본의 비문학, 에세이를 주고 번역하는 박상연 씨는 정확한 정보전달과 함게 명료함에 집중한다.
박상연 씨는 오가와 류키치, 타키자와 타다시 작가의 ‘어느 아이누 이야기’를 각각 일본어와 한국어로 번역하고 현재 가쓰 가이슈의 ‘히카와 청화’를 작업 중이다.
박상연 씨는 “문학은 상상이나 맥락에 따른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게 가능하지만, 비문학은 정확함과 명료함에 기반을 둔다. 고유명사, 표기법부터 시작해 외래어 등 정확하게 표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일본 문장은 화자나 필자의 호흡에 따라 한 문장이 네 다섯 줄로 완성될 때가 있다. 이를 한국어로 고치다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흐려질 때가 있어 어디서 끊고, 주어와 서술어를 어떻게 결합시켜야 할지, 글의 캐릭터가 명료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고심한다. 이런 작업이 한국인에게도 조금 더 수월하게 읽힌다”고 일본어를 한국어로 고칠 때 중요하게 중점을 두는 부분을 밝혔다.
박상연 씨가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스스로가 책의 취지에 공감하느냐부터 시작된다. 취지에 공감하거나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원문과 자료를 받고 마감 기한 등을 체크한다.
박상연 씨는 “책을 번역하기로 결정하면 통독을 먼저 한다. 통독을 하며 글 속에 들어갈 자료들을 정리한다. 이후에는 초벌 번역을 한다. 이 때 상황에 따라 역자의 주석을 달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를 일본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한국인들을 모른다. 이것들을 제가 다 찾아서 달아야 한다. 초벌 때는 이 부분과 표기법이 애매하거나 자료가 미홉한 것들에 집중한다. 다음에는 검토한걸 엑셀 파일에 정리해 언제든지 언어를 찾아볼 수 있도록 용어 베이스를 만든다”고 번역 과정을 설명했다.
여기까지 작업이 끝나면 출판사 편집자와 교정회의가 시작된다. 박상연 씨는 “직업이 번역가지 국어학자나 출판 전문가는 아니니, 편집자와의 크로스 체크가 중요하다. 많게는 6~7교까지 의견과 수정이 오간다. 이 작업을 마친 후 책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출신 알베르토 몬디 씨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묵상집 ‘겨자씨의 말씀’, 동화 ‘나만의 별’을 우리나라 말로 소개해 번역가에 도전했다. 그의 번역 도전은 자서전 출판으로 인연을 맺은 틈새책방 대표에게 이탈리아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면서 이뤄졌다.
알베르토 몬디 씨는 “프란시스코 교황은 종교에 상관없이 존경하는 사람이 많다. 이걸 한국어로 번역해 알리는 일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책에 대한 반응이 나쁘지 않아 동화책도 번역하게 됐다”고 전했다.
전문 번역가가 아닌 알베르토 몬디는 방송일을 마치고 틈틈이 번역에 매진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 아이를 재운 후인 오후 11시부터 12시까지를 번역할 수 있는 시간으로 정했다.
알베르토 몬디 씨는 “‘나만의 별’은 동화책이라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써야했다. 아이를 키우며 한국 동화책을 많이 읽은 것이 도움이 됐다. 그래서 최대한 한국동화책에 나오는 단어들을 선택하려 했다. 이탈리아는 남성형 단어와 여성형 단어가 나누어져 있다. 이번엔 이 부분을 가장 고려했다. ‘나만의 별’ 주인공이 용인데, 이탈리아 남성 언어로 용은 드라고, 여성 언어는 드라고나라다. 이탈리아 사람은 구분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드라고와 드라고나라를 주인공 이름으로 정했다. 이런식으로 언어적 차이가 많았다”고 동화번역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 “‘겨자씨 말씀’은 번역 자체가 어려웠다기보단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는게 힘들었다. 이탈리아 말을 잘하는 한국 신부님께 검수를 받고 많은 조언을 들은 끝에 완성됐다”고 덧붙였다.
알베르토 몬디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가교 역할을 방송 뿐 아니라 번역을 통해서도 이어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좋은 기회가 있다면 한국 문화를 이탈리아에도 소개할 수 있는 책을 번역하고 싶다. 그 작업을 제가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언젠가 한국의 소설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