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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㉖] ‘파친코’ 진하의 연기란 무엇인가


입력 2022.03.24 10:47 수정 2022.03.24 10:47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진하 ⓒ출처=네이버 블로그 kittyr4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배우들을 인터뷰하노라면 비슷한 대답을 많이 듣게 된다. 연기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배우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요? 질문이 뻔해서일 수도 있지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원형이 있기도 해서다.


그러함에도 묻는다. 이번 캐릭터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는지, 어떤 태도로 작품에 임했는지보다 훨씬, 한정된 시간 내에 그 배우가 지닌 사고나 철학에 가까이 다가갈 방법이기 때문이다.


때로 묻지 않았는데, 먼저 얘기할 때가 있다. 심심하면서도 까다로운 질문을 면하게 해 주니 좋고, 연기의 본질과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상시 생각하는 면모에 마음속 박수가 일기도 한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감독 코토나다·저스틴 전)의 주연 배우 진하도 그랬다.


한국인 핏줄, 미국 유학, 일본인이기를 거부한 자이니치 '솔로몬'을 연기한 진하 ⓒ출처=네이버 블로그 x6913

배우 진하는 윤여정이 연기한 선자의 손자 솔로몬을 연기했다. 솔로몬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가 낳은 둘째 아들 모자수(박소희 분)의 아들이다. 드라마 ‘파친코’가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겪는 선자의 부모를 기점으로, 2세대 선자, 3세대 모자수, 4세대 솔로몬까지 4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를 통해 조국을 잃은 역사의 아픔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고충을 그림에 있어 마지막 세대의 주역이다.


솔로몬은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 명문 예일대까지 졸업했지만, 여전히 ‘자이니치’(在日,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을 일컫는 말. 한국전쟁 이후 조국을 남한과 북한 중 어디를 택했는가에 따라 국적 표기는 한국과 조선으로 나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인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자부심이다)의 차별과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다시금 용기를 내는 의지의 인물이자 할머니 선자와 마음으로 통하는 착한 손주다.


본래 진하에게 던져진 질문은 ‘자이니치’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있어 ‘코리안 아메리칸’(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삶이 접목되는 부분이 있는가였다. 함께 인터뷰에 나선 선배 윤여정이 거듭 말하듯 무척 철학적인 진하는 솔로몬이라는 캐릭터에 다가간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는데, 그 대답 중간 예상치 못한 얘기가 나왔다. 진하에게 있어 연기란, 배우라는 직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주 짧은 문장들이었고, 뭘 그리 호들갑이냐 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랜 세월 숱한 배우들을 만났지만 ‘처음 듣는’ 배우에 관한 생각이어서다.


'파친코' 프리미어 시사에 고운 한복을 입고 등장하더니 인터뷰 자리에도 개량 한복 상의를 입고 나타났다. 성적 정체성과 상관 없이 아름다운 옷이어서 미국 뉴욕의 한 가게에서 여성 한복을 빌려 왔다는 진하. 그의 인간적 개성과 배우로서의 매력을 한국 작품에서도 볼 수 있기를. ⓒ이하 애플TV+ 제공

“제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솔로몬의 처지에) 공감되는 부분 많았습니다. 차이점도 있죠, 저는 자이니치가 아니고 일본어를 못하죠. 미국에서 일했던, (재일) 미국 기업에서 일하는 솔로몬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 금융업 종사를 고민한 적이 있어요, 여름방학 때 은행 인턴도 고려하고요. 배우를 하지 않았다면 솔로몬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연기는 공감, 모든 것에 마음을 열어놓고 하는 일이죠. 배우는 인류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직업이고요. 그 길을 알지 못했다면 저는 ‘마스크’(사회적 가면)를 쓰고 어떠한 경우에도 성공을 향하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요. 배우로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선자의 희생과 선택으로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부모님의 희생이 있어 오늘에 왔고요. 그런 역사를 미국 TV쇼(애플TV+ 드라마)에서 보여드릴 수 있는 게 영광이고 특권입니다. 언젠가 제 가족의 역사를 연기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와 영광입니다. 많은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희생’에 대해 어떻게 하면 정상화할 수 있을까, 무게감을 두고 생각하며 연기했습니다. 드라마가 (그 희생을) 너무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진하는 자신의 연기보다 드라마 자체에 공을 돌렸지만, 동석한 배우 윤여정은 진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배의 등을 두드리며 “얘 정말 잘했어!”라고 칭찬했다. 희생을 정상화하다, 한국어로 쉽게 바꾸자면 부모님 세대의 희생이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는 것, 희생에 걸맞은 보답을 받는 것이리라. 자신의 연기가 그러한 정상화에 작으나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고 하니 윤여정의 말대로 정말 철학적이다.


“연기는 공감, 모든 것에 마음을 열어놓고 하는 일이죠. 배우는 인류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직업이고요.”


묻지도 않았는데 들었다는 연기론, 배우로서의 직업관이 담긴 말이다. 특히 두 번째 문장에서 감동이 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가 왜 필요한지, 그 전달을 위해 배우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어왔다. 그런데, ‘인류애’란다. 간디나 테레사 수녀에게서 듣던 인류애가 진하의 입에서, 그것도 너무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나왔다. 아, 이런 마음으로 배우라는 직업을 택해 살아가니 솔로몬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함에 있어 ‘희생의 정상화’를 생각하는 것이구나! 그가 말하는 마음을 열어놓는 ‘모든 것’의 범주가 우주로 한없이 확장됐다.


할머니와 손주의 살가운 호흡이 빛난 배우 윤여정과 진하(오른쪽부터) ⓒ

“기억이 나는 순간이 있는데 첫 촬영, 기차역이었어요. 그린룸(무대 뒤 공간의 휴게실)에서 대기할 때, 윤여정 선배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 있었는데. 제게 특정한 장면에 대해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몰라요. 세상에 내가 마스터 윤여정과 얘기하다니, 꿈이 이뤄지는구나!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하지만, 실제 연기에 들어가면 제가 집중해야 하는 일은 ‘스타와 일한다’보다는 장면과 관계에 대한 집중이지요. 저의 할머니를 좋아하는데 가까이 살지 못해 아쉬웠는데 선자 할머니와 함께 호흡하며 관계 맺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마음을 열어 선후배 연기자가 아닌 할머니와 손주가 되어 작품에 임한 진하의 마지막 인사에도 ‘짧지만 힘 있는’ 말이 들어 있었다. 진하를 통해 ‘우리의 얘기’가 계속되기를, 그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정도 규모로 한국 관객을 만날 수 있어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우리의 얘기, 우리를 위한 얘기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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