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펀드 재정공약' 직후의 발언
'60억 달러' 바이든 앞에서 1억 달러
출자 약속하고 감사의 인사 받은 尹
'영빈관 철회' 떠올리며 걱정됐을 듯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이 정리되지 않으면서 국익 훼손과 한미관계 손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여러 정황상 '이 XX들'이 미국 의회가 아닌 우리 국회와 야당을 겨냥한 것이 맞다면, 이에 대한 유감 표명 등 사후 수습은 귀국 이후에 하되, 일단 외교적 오해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카이 카헬레 미국 하원의원은 23일 SNS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의회를 'XX들(idiots)'로 폄훼했다는 내용의 워싱턴 포스트 기사를 공유하며 "20%대 지지율의 대통령은 본인의 나라에나 신경쓰라"고 말했다. 카헬레 의원은 올해 치러진 하와이 주지사 후보 민주당 경선에서 3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미국 유력 정치인마저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를 폄훼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윤 대통령은 정말 미국 의회를 폄훼했을까.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떻게 하느냐"는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미 의회를 겨냥한 '외교참사'라기 보기 어려운 정황이 많다는 분석이다.
첫째로 발언이 나온 상황이다. '글로벌펀드 재정공약'은 범세계적인 감염병 퇴치를 위한 각국의 기금을 모금하는 행사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미국은 60억 달러를 공약했다. 독일은 20억 달러, 캐나다는 13억 달러, 일본은 10억8000만 달러, 프랑스는 3억 달러, 우리는 1억 달러를 약속했다. 출자 액수가 우리가 미국의 60분의 1, 일본에 비해서도 10분의 1 미만으로, 그마저도 이행이 안된다면 '쪽팔릴' 사람은 윤 대통령일 개연성이 높다.
둘째로 직후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 사이에 스탠딩 환담이 있었다. 모금을 주도하는 입장인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대한민국의 출자에 감사의 뜻을 표했을 것이다. 48초 간의 대화 영상을 보면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스킨십까지 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윤 대통령은 출자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단상에서 내려오는 셈이다.
셋째로 직전의 국내 정치 상황이다. 출국 직전 국내 최대 현안은 영빈관 신축 예산 논란이었다. 878억 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편성했다가 야당의 십자포화를 맞자, 윤 대통령은 이를 황급히 거둬들인 뒤 출국했다. 1억 달러는 약 1400억 원이다. 자신이 거둬들이고 출국한 영빈관 신축 예산보다 두 배 가까이 된다. 단상을 내려오는 윤 대통령은 문득 걱정이 들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두리번거리며 주무장관인 박진 찾아
"1억 달러도 국회 승인 나지 않으면
바이든에 쪽팔리다"는 당부의 의미
의원입각 4선 장관에 미션 부여한 셈
넷째로 발언의 상대다. 단상을 내려온 윤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투덜거리듯 혼잣말을 하려는 모습이 아니다. 명확히 두리번거리면서 박진 외교부 장관을 찾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박 장관에게 뭔가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라는 의미다. 박 장관이 곁에 오자 비로소 문제의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떻게 하느냐"는 발언이 나온다.
다섯째로 왜 박진 장관을 찾았느냐는 점이다. 1억 달러를 출자하려면 예산안에 반영해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주무부처인 외교부의 예산으로 편성해야 한다. 게다가 박진 장관 본인도 현역 4선 의원으로 의원입각해있는 신분이다. 1억 달러도 승인이 나지 않으면 60억 달러를 공약한 바이든 대통령 보기 '쪽팔리니까' 국회에서 어떻게든 해보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로 "국회"를 언급했다. 미국 의회를 겨냥했다면 "국회"가 아닌 "의회"라고 했을 개연성이 높다. 게다가 "이 XX들"이라고 칭하려면 무슨 은원(恩怨)은 있어야 한다. 이준석 전 대표나 민주당이라면 그렇게 칭해질 수 있지만, 윤 대통령과 미 의회 사이에는 접점 자체가 없었는데 대뜸 "이 XX들"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 박 장관도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곱째로 실제로 국회 승인을 걱정할만한 상황이다. 영빈관 예산 878억 원을 철회했던 기억을 제쳐놓더라도 '행사에 가서 48초 환담하려고 1억 달러를 공약했느냐'는 비난이 예산심의 과정에서 나올 수 있다. 요즘은 모든 게 정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가정이 아니라 야권 일각에서는 실제로 이미 그런 비난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무난히 1억 달러가 승인될지 걱정하는 게 기우가 아닌 셈이다.
여덟째로 미 의회에서 승인될지를 걱정하는 게 너무나 어색하다. 예산·세입·세출은 통상적으로 하원의 권한인데, 하원은 재적 434석 중 바이든 대통령의 집권 민주당이 222석으로 안정적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바이든 대통령 본인이 7선 상원의원 출신으로 의회를 다루는데 능숙하다. 지금까지 바이든 행정부에서 이런 류의 승인이 문제가 됐던 적이 없다.
아홉째로 걱정을 해야 한다면 윤 대통령이 걱정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 바이든 대통령과는 달리 국회는 압도적 여소야대 상황이고, 윤 대통령 본인도 국회의원 경력이 전무해 정당 및 국회와의 관계 설정에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4선 중진 박진 장관을 상대로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을 걱정했다면, 박 장관은 '누가 누굴 걱정하는가 싶어' 벙쪘을 것이다. 당연히 윤 대통령이 본인 걱정을 했다고 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48초 환담하려 1억 달러 공약했느냐"
실제로도 야권 일각서 이미 공격해와
국회 승인 걱정, 尹대통령 기우 아니다
반면 '바이든 걱정'이라 보면 너무 어색
결국 윤석열 대통령의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떻게 하느냐"는 발언은 "(우리나라) 국회에서 (민주당) 이 XX들이 (1억 달러도)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이 (보기) 쪽팔려서 어떻게 하느냐"는 의미임이 분명해 보인다는 관측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사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이 나온 전후 맥락을 고려해볼 때, 이제는 미 의회가 아니라 우리 야당을 가리킨 발언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면서도 "'날리면' 이런 것들이 일종의 '국민 스포츠'처럼 희화화됐기 때문에 관성으로 공격이 굴러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윤 대통령 발언의 실제 의도는 미 의회를 겨냥했던 것이 아닌데도 논란이 정리되지 않으면서, 미국 하원의원이 반응하는 등 국익 훼손과 한미관계 손상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교참사'가 아닌 게 명백한데도 국내 정치적 의도로 이 사안에 대한 공방을 끌고가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는 목소리가 제기되는 이유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윤 대통령의 '이 XX' 비속어가) 우리 국회를, 야당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많이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야당을 향해 "대통령의 외교 활동이 국내 정쟁 대상이 돼서 성과가 깎아내려지는 일이 없도록 비판하더라도 귀국 후에 비판한다든지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태 수습을 위한 첫발을 내딛은 발언이라는 평가다.
한편 일각에서는 처음부터 바이든으로 자막처리를 한 방송사를 놓고서도 장외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는 "국익을 위해서 희생돼도 좋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는 "이는 '외교참사'를 말하기 이전에 '언론참사'"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