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국가안보 및 경제성장 책임질 산업으로 위상 높아져
미중 갈등 심화로 '글로벌 연합전선' '초격차 기술 개발' 경쟁 치열
메모리 강자 韓, 팹리스·파운드리 추격으로 글로벌 기술 우위 높여야
코로나19에 따른 펜트업 효과(Pent-up effect)가 소멸되고 경기침체가 글로벌 전역을 뒤덮으면서 반도체 산업에 유례없는 한파가 불어닥쳤다. 수요 부진과 가격 하락 이슈는 올해 내내 제조사들을 괴롭힐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를 둘러싸고 미·중의 힘겨루기와 기술 강국들의 움직임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한국의 돌파구 마련도 더욱 시급해졌다. 기로에선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주]
'수출 규제'로 노골화된 미국의 대중국 견제로 반도체 기술 강국들이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을 위해 우호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가 하면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무기로 자국 내 제조 기반을 강화하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책임질 핵심 산업으로 반도체가 주목을 받으면서 이같은 국가·기업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최첨단 기술 개발과 더불어 인재 확보를 위한 각국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 화두는 미·중 패권 다툼에 따른 '글로벌 동맹 구축'과 첨단 기술 확보를 위한 '반도체 초격차' 전략으로 요약된다.
미국은 지난해 7월 미국 내 설비 투자 시 최대 25%의 세제혜택을 부여하는 반도체와 과학법을 통과시킨 데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 반도체 생산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강력한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반도체 굴기'를 목표로 하는 중국의 추격을 최대한 저지하겠다는 목표다.
한층 노골화된 미국의 대중국 견제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네덜란드 등 우호국들의 참여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네덜란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의지를 밝히며 이들 국가의 적극적인 협력을 촉구했다.
중국과의 공급망 싸움에서 이기려면 반도체 소재·장비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갖춘 네덜란드·일본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수출제재에 보조를 맞춰야만 반도체 첨단 기술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에도 중국으로의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통제장치를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미국의 반도체 '공동 전선' 요구가 우호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전역으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국·중국의 신냉전 움직임에 낀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안보와 더불어 경제 실리를 취하는 '절묘한 균형'으로 대응하고 있다. '시장으로서의 중국'을 놓칠 수 없는 만큼 미국의 전략에는 동의하되 최대한 실리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리에 슈라이네마허 네덜란드 통상장관이 1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TV에 출연해 "미국이 지난해 10월 새로운 규칙(대중국 수출 규제)을 들고 나오면서 운동장이 바뀌었다"며 "우리는 그 제안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국 목소리를 높인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역시 중국 내 생산설비가 적지 않은 데다, 최대 수입국 역시 중국인 만큼 중국과의 협력을 지속하되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과의 관계도 함께 가져가는 전략을 내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각국은 이처럼 미·중과의 관계 구축에 전략적으로 나서는 한편, 기술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공급망 내재화에도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일본의 경우 지난해 말 토요타, 키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 UFJ은행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 8곳이 뭉쳐 드림팀 '라피더스(Rapidus)'를 결성했다.
신설 기업인 라피더스를 통해 슈퍼컴퓨터, 스마트시티,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미래 기술 분야에 필요한 로직반도체 등 차세대 반도체 양산을 2027년부터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 10년간 5조엔(약 48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대만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1위 파운드리 업체인 TSMC는 최근 3나노 기반의 파운드리 양산 계획을 발표하며 애플, 엔비디아, AMD, 퀄컴 등을 주요 고객사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를 통해 60%에 육박하는 글로벌 점유율을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이다.
미국 인텔도 파운드리 분야 재진출 계획 아래 200억 달러를 투자해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2곳을 짓고 있다. 반도체 설계에서 제조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로, 내년부터 3나노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는 방침이다.
유럽연합(EU)은 2030년 반도체 생산능력 20% 확보를 목표로 최대 430억 유로(약 59조원)를 투자하는 'EU 반도체칩법(EU Chips Act)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반도체 산업의 게임체인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골적인 미국의 견제를 받고 있는 중국의 반격도 무섭다. 중국은 '과학기술 자립·자강'을 강조하며 반도체 국산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특히 미국의 제재 조치에 대항해 설계 분야 및 파운드리 점유율 제고를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대부분 국가들이 전략 산업으로 육성중인 반도체가 미·중 갈등을 계기로 더욱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술 중심에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돌파구 마련도 시급해졌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양사 모두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반도체 설계, 위탁생산 등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아직까지 추격자에 머물고 있는 만큼 전략적인 R&D, 설비투자가 요구된다. 실제 삼성전자는 작년 3분기 기준 파운드리 시장에서 12%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대만 TSMC(53%)와 4배 이상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격차를 좁히려면 글로벌 생산설비 투자와 R&D, 인재 육성 등 다각적인 경쟁력 제고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다. 기업 뿐 아니라 정부에서도 적극 나서 반도체 설비 투자 시 세제혜택 확대 등 정책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김종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메모리 분야에서의 강점을 토대로 수요에 기반한 팹리스 역량을 강화하고 산·학 연계 및 협력 활성화를 통한 파운드리 성장 전략 추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