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사랑을 뜨겁게, 그것도 오래도록 받은 배우들에게서는 빛이 난다. ‘스타’ 탄생의 비법과 항상성의 비결이다.
대중의 힘은 참 오묘하고 세다. 덜 예쁜 이도 더 예뻐 보이고, 똑같은 연기도 더 잘해 보인다. 한 번 사랑받기 시작하면 승승장구하는 이유다. 결국 스타를 만드는 것도, 오래도록 ‘스타’이게 하는 것도 대중의 사랑과 관심이다.
이런 당연지사에도 예외가 있다.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데 벌써 예뻐 보이고 이미 연기가 돋보이는 배우들이다. 비결은 자존감에 있다.
어떤 배우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실제로 연기력도 부족하지만, 대중이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을 느끼며 자존감이 커간다. 마침내 사랑받아 마땅한, 스타이기에 부족함 없는 배우가 된다.
하지만, 또 어떤 배우들은 언젠가 나를 발견해 줄 날을 기다리며, 바로 그날에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스스로 다독이며 연기력을 다져 놓는다. 소수가 알아보고 일부가 호평해도 그것을 비옥한 자양분으로 삼을 줄 아는, 자존감 높은 배우들이다.
일테면, 배우 이봉련이 그러하다. 누구는 일찌감치 대학로 창작뮤지컬 ‘빨래’에서 주인 할매를 천연덕스럽게 잘할 때 알아봤을 것이고 어떤 이는 드라마 ‘내일 그대와’의 오소리 역을, 다른 이는 영화 ‘버닝’의 해미(전종서 분) 언니를 인상 깊게 봤을 것이다.
그래도 대중이 이봉련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기 시작한 건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2021) 때부터다. ‘내일 그대와’의 유제원 감독이 그를 믿고 공진마을 5통 통장 여화정을 맡겼고, 이봉련은 겉으로는 뻣뻣해도 속정 깊고 대차면서도 부끄럼 타는 인물을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여화정이 왜 그리 대중의 가슴 속으로 쑥 들어왔을까. 당연히 이봉련이 연기를 잘해서다. 그러면 어떻게 잘했는가. 현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인물을 창조했다. 여화정은 이혼 후 아들 하나 바라보며 억척같이 살면서도 반듯한 옷매무새와 머리 손질, 화장을 놓지 않는다. 화려하게 꾸민다는 게 아니라 흐트러지지 않고 살겠다는 의지를 내면 연기뿐 아니라 외형에도 심어 놓으니 여화정의 성격이 단박에 다가온다.
그렇게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어 보이면서도, 어처구니없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전 남편 장영국(인교진 분)을 챙긴다. 여자로서 흔들린 건지는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 어른으로서 철없는 첫째 아들 같은 영국을 살핀다. 그런 연민, 인지상정의 인간미가 이봉련이라는 배우를 빌려 표현되니 설득력이 깊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분명 더욱 마음이 가는 배우가 있다. 이유를 알기도 전에 괜히 정이 가고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봉련이 그러하다. 특히 이봉련은 얼굴과 발성으로 우리가 그를 믿게 하고 정을 느끼게 한다.
먼저, 얼굴. 정감 가는 얼굴은 이봉련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성적표다. 그 얼굴로 매서운 캐릭터도 찰떡같이 소화하는 연기력을 지녔지만, 인간미 있는 인물일 때 공감도가 증폭된다. 캐릭터는 배우의 인성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성. 이봉련의 목소리는 고우면서도 허스키하다. 맑으면서 탁하다. 우주 최고의 음색이라고 할 수 없지만, 아주 잘 구별되어 들리게 독특한 발성을 지녔다. 이봉련의 발성에는 운율이 있다. 운율 중에서도 음의 고저 차가 크고 음량의 대소 차가 큰, 자유자재의 ‘갖고 노는’ 운율이다.
그래서 때로는 시처럼, 어느 순간엔 랩처럼 들린다. 이봉련은 책 읽듯 띄어쓰기에 맞춰 운율을 놓지 않는다. 때로 엇박으로, 혹은 불규칙하게 발화하는데 그렇다고 의미 전달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남과 다르게 개성 넘치는’ 말로 들린다. ‘듣는 맛’이 있다.
놀라운 건, 이봉련의 운율 넘치는 발성이 되레 현실감을 높인다는 것이다. 세상 어딘가에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실의 평균’과는 거리가 먼데도, 오히려 그 개성 넘치는 발성이 그 인물을 실감 나게 한다.
당장 드라마 ‘일타 스캔들’(연출 유제원, 극본 양희승)만 봐도 그렇다. 이봉련은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였던 남행선(전도연 분)의 인생 절친으로, 행선의 반찬가게에서 일하는 직원 김영주를 맡았다. 남행선에 비해 이름부터 평범하고, 의리파에 농담 따먹기 좋아하고 술 내기며 달리기 내기 좋아하고, 변변히 실속 있는 연애 못 해본 것도 남행선과 똑같다.
도대체 캐릭터의 개성을 살릴 구석 찾기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비슷한 성격과 성질의 인물을 ‘지구 최고’ 연기력 전도연과 해내야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적어도 이봉련에게는 가능하다. 배우 이봉련은 ‘달라 보이려’ 무리하지 않는다. 그저 남행선을 좋아하고 남행선을 지지하는 친구로서 그 곁에서 맞장구를 친다. 남행선에게 삐쳐도 진심으로, 욕을 해도 진심으로 한다.
그 결과 전도연과 이봉련의 연기는 결코 비슷해 보이지 않고, 그저 산전수전 함께 겪은 ‘단짝’ 남행선과 김영주로 보인다. 두 인물의 성격이 비슷한 게 캐릭터 잘못 잡은 연기로 보이는 게 아니라 실감 연기로, ‘찐’ 단짝 친구로 다가온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김영주와 남행선이 똑같지 않다. 김영주에 개성을 부여하는 여러 특성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게 역시나 이봉련의 발성이다. 특유의 느릿한 듯하다가도 일순간 속사포가 되고, 잔잔한 듯하다가도 파도가 되는 발성이 김영주를 입체적 인물로 만든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대중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아온 스타 전도연에게는 그 사랑의 온도와 기간에 비례해 배우로서의 힘이 있다. 같은 연기를 해도 무게가 실린다. 잘 지은 연기 농사로 얻은 수확이다.
상대적으로 이제 대중이 알아봐 주고 칭찬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봉련의 연기가 전도연과 대등해 보일 수 있는 건, 이봉련이 세상에 낸 인물 김영주가 전도연의 남행선과 대등한 동료이자 죽마고우로 보이는 건, 이봉련이 인생을 걸고 쌓아온 ‘연기 내공’ 덕이다. 그 덕을 드라마 ‘일타 스캔들’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