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대비 휘발유 208원, 경유 320원 이상 수직 상승
2~3주 시차 공식 깨진 폭등…"정유사 공급가 투명하게 공개하라"
지난 8일 저녁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주유소. ⓒ데일리안 정진주 기자
"불과 두 시간 만에 100원 가까이 오르더군요.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옵니다."
인천 거주 30대 유 모 씨는 이란 사태 초기에 겪었던 황당한 경험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충돌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치솟기 시작한 유가는 지난 주말을 지나 9일까지도 시민들의 체감 경기를 분노로 바꿔놓고 있다.
보통 국내 주유소 가격은 국제 석유제품 가격 변화가 2~3주의 시차를 두고 반영되는 게 일반적이다. 싱가포르 시장의 가격 변동이 국내 소매가에 도달하기까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해서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달랐다.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위험 프리미엄이 즉각 반영된 데다 환율 급등과 정유사의 전격적인 공급가 조정이 맞물리며 이례적으로 시차 없는 폭등이 나타났다.
지난 8일 저녁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주유소. ⓒ데일리안 정진주 기자
이날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을 보면 사태의 영향이 가시화되기 전인 지난달 말까지만 해도 유가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지난달 28일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1692.89원이었으며 경유는 1597.86원이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 사이 상승세는 무서울 정도로 가팔라졌다. 이날 오후 3시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ℓ당 1900.65원, 서울 평균은 1949.02원을 기록하며 파죽지세로 오르고 있다.
경유 역시 지난 8일 기준 1917.73원을 기록하며 휘발유 가격을 이미 추월했다. 불과 열흘 남짓한 사이 휘발유는 ℓ당 208원가량 올랐으며 서민 경제의 심리적 저항선은 무너졌다.
1700원대 주유소 찾아 "원정 주유" 전쟁
지난 8일 서울에 위치한 한 알뜰주유소. ⓒ데일리안 정진주 기자
현장의 풍경은 더욱 절박해졌다. 본지가 지난 주말 서울 시내 주유소들을 점검한 결과, 신월동의 한 주유소로 휘발유 1969원, 경유 1999원을 기록해 ℓ당 2000원 시대가 코앞임을 실감케 했다. 근처 또 다른 주유소 역시 고급 휘발유 가격이 이미 2017원에 달했고 일반 휘발유는 1812원, 경유는 1809원이었다.
저렴한 가격이 장점인 알뜰주유소조차 휘발유 1887원, 경유 1934원을 기록하며 가격 인상 압박을 피하지 못해 시민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양천구의 한 직영 주유소는 휘발유 1797원, 경유 1770원을 유지해 주유를 기다리는 차량 줄이 길게 늘어서 도로까지 대기 행렬이 이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해가 진 늦은 시간임에도 빈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붐볐다.
이에 놀란 운전자들은 스마트폰 앱으로 저렴한 곳을 찾아 외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양천구의 한 직영 주유소 앞은 주유를 기다리는 차량 줄이 길게 늘어서 도로까지 대기 행렬이 이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해가 진 늦은 시간임에도 1700원대 가격을 유지 중인 주유소는 빈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붐볐다.
지난 8일 서울 강서구이 위치한 주유소. ⓒ데일리안 정진주 기자
기름값 폭탄에 시민들은 이동 수단 자체를 바꾸거나 생활 반경을 좁히고 있다. 서울 거주 30대 강 모 씨는 ℓ당 1800원을 심리적 저항선으로 꼽으며 "지난 주말엔 근교 드라이브 대신 동네에서만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40대 진 모 씨는 "평소 자동차로 출근해왔는데 기름값이 지나치게 올라 최근엔 조금 오래 걸려도 대중교통으로 출근하고 있다"고 했다.
40대 박 모 씨는 지방 출장 중 이란 사태 뉴스를 듣자마자 휴게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워 화를 면했다고 전했다. 그도 "최근엔 가까운 곳에 갈 때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당분간 멀리 놀러 갈 생각도 안 한다"고 말했다.
서울 거주 30대 유 모 씨는 지난 주말 집에서 꽤 먼 곳임에도 아직 가격을 덜 올린 주유소를 찾아 기름을 가득 넣고 왔다. 유 씨는 "기름값 2000원 넘어가면 이제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할 생각이다"라며 "유류세 감면 일몰을 앞두고 있는데 소비 침체 방지를 위해 감면 확대 등 정부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유 전쟁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세종 거주 30대 임 모 씨는 이란 전쟁 뉴스 다음 날 바로 ℓ당 1600원대에 기름을 가득 채워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고 밝혔다.
성남 거주 20대 정 모 씨는 "싼 곳을 찾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주유하는데 다들 똑같은 생각이라 대기 줄이 엄청나다"며 현장의 긴박함을 전했다. 30대 윤 모 씨는 주말 나들이 중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간신히 1700원대 주유소를 찾아 줄을 서서 주유하기도 했다.
경기도 거주 30대 정 모 씨는 "교통편이 불편해 비싸도 감수하고 있지만 전쟁 직후 시차 없이 바로 오르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지난 8일 경기 부천시에 위치한 주유소. ⓒ데일리안 정진주 기자
불투명한 유가 정보와 정부 대책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30대 고 모 씨는 "온라인으로 가장 싼 곳을 찾아가도 실제 가격과 다른 곳이 많아 당황스럽다"며 "수시로 변하는 가격에 기름값이 너무 비싸 차로 출퇴근하는 게 두렵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30대 직장인은 "정부가 단속한다고 하지만 실제 효과가 언제 나타날지 막막하다"며 "수도권 대비 지방은 부르는 게 값인 듯해 일주일 사이 1000원~1500원 올린 곳도 있다"고 비판했다.
대중교통 이용자들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30대 직장인 한 모 씨는 "운전을 자주 하지 않아 아직 유가 상승이 체감되지는 않으나 화물차 운전자 등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아 우려된다"고 전했다. 그는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기 전에 공급받은 물량일 텐데 너무 빠르게 조직적으로 기름값을 올려 폭리를 취하지 않도록 정부가 모니터링을 잘 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산업계의 비명도 커지고 있다. 물류업체를 운영하는 한 사장은 "일주일 사이에 경유 가격이 ℓ당 400원 정도 올라 장거리 운행을 꺼리는 기사들이 늘고 있다"며 "운송비 상승은 제조업 관리비 증가로 이어져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기름값 급등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도 뜨겁다. 한국주유소협회는 가격 상승의 1차적 원인이 정유사의 공급가 인상에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최근 국제유가와 환율 상승으로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지한 휘발유 공급가가 1900원 안팎까지 치솟아 소매가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협회는 주유소의 실질적인 유통 마진이 2% 미만인 상황에서 판매가격을 폭리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강조하며 정부의 최고가격제 도입 시 공급가 연동과 손실 보전 등의 안전장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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