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집행위원, 결정권자 여러분. 제발 합병을 파기시켜주세요. 독점 폐해가 벌써부터 난리입니다." "합병하는 순간 표 값 인상은 불보듯 뻔하다."
지난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 심사와 관련한 기사를 작성하니 이런 댓글이 달렸다. 이전에는 초대형 항공사의 탄생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많았는데, 최근엔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독과점을 우려하는 여론이 적지않은 모습이다.
기업결합심사에 나서는 국가들이 승인을 망설이는 것은 초대형 항공사가 된 대한항공이 각국을 오가는 노선을 독점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 때문에 노선 반납을 조건으로 승인을 해주거나, 추가적인 사안을 검토하느라 승인을 미루기도 한다. 해당 댓글이 달린 기사 역시도 EU가 노선 독과점을 우려해 기업결합 추가 조사를 결정했단 내용이었다.
국내 항공산업 재편을 방해하는 EU에 대해 우리 소비자들이 오히려 응원하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만 해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과 관련한 기사에는 초대형 항공사를 응원하며 합병이 성공적으로 성사되길 바라는 목소리가 많았다.
부정적으로 돌아선 여론은 지난달 중순 불거진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안 논란 이후부터 불거진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은 장거리 노선 항공권과 좌석 승급에 필요한 마일리지를 기존 대비 크게 늘리는 개편안을 내놨었다. 소비자들은 '버킷리스트'를 위해 어렵게 쌓은 마일리지의 가치가 떨어지니 즉각 반발했고, 여기에 정부까지 가세하면서 대한항공은 뭇매를 맞았다.
대한항공이 좀 더 빠른 사과나 시정안을 내놓았으면 조금은 나았겠지만, 해당 개편안이 단거리 노선에 대한 공제율이 낮아진 만큼 혜택을 오히려 늘린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정부는 대한항공에 "국민 불만을 사는 해명을 내놨다"고 몰아세웠고, 결국 대한항공은 백기를 들었다.
대한항공이 개편안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 됐지만, 이제 소비자들은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고 난 이후 부작용을 더 걱정하는 듯 하다.
소비자들이 우려하는 건 노선 독점 자체가 아니라 독점한 노선에서 서비스와 가격을 독점하는 것이다. 경쟁사였던 아시아나항공이 없어지면 마일리지 등 혜택이나 서비스를 줄여도 선택지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이 합병한 후에 소비자를 상대로 서비스 독점을 이어갈 것이란 예상이 마치 기정사실화 된 것 처럼 말이다. 이제는 신뢰의 문제다.
안 그래도 길어지는 인수작업에 합병 이후의 재무 상태까지 걱정해야하니 대한항공도 머리가 아플 일이다. 이 때문에 부채로 분류되는 마일리지를 빠르게 털어내려 했을 것이다. 게다가 기업결합 심사 과정에서 슬롯 출혈이 이어지면서 합병 시너지에 대한 의문까지 고개를 드는 상황이니 마음은 더 급해졌을 터다.
하지만 방식이 한참 잘못됐다. 소비자들에게, 그리고 경쟁당국에게 독점 우려가 없음을 보여줘야 할 판인데, 오히려 독점 이후의 부작용을 '맛 뵈기'로 보여준 꼴이 됐다.
안그래도 기업결합 심사로 각국에서 제동을 거는 판에 국내에서 발생한 마일리지 논란은 합병 불승인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설령 기업 결합 승인을 모든 국가에서 따내 합병을 성사한다 해도 국내 여론이 반기를 든다면 3년간 합병에 공들였던 대한항공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다.
코로나19로 도산 직전에 처했던 아시아나항공을 기꺼이 끌어안으려던 의지를 누가 알아줄까. 결국은 초대형 항공사의 탄생 역시도 국민들이 자랑스러워해야 '대단한 업력'이 되는 셈이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항공사가 아닌 민간기업인 만큼 이익 추구가 목적인 것은 당연하지만, 전세계 5위권에 드는 초대형 항공사를 목표로 한다면 그 자리에 걸맞는 책임은 응당 따른다. 새로운 도전을 앞둔 중요한 시기인 만큼 지금의 대한항공을 만든 것이 비단 경영진의 '돈 버는 능력'이 전부가 아님을 깊이 새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