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금 빌미로 美, 韓 반도체 기업 '양자택일' 강요
韓, 독소조항 제거·완화 등 美 전향적 자세 끌어내야
내달 열리는 윤석열 정부의 세번째 한·미 정상회담에 그 어느 때 보다 업계의 관심이 높다. 우리 정상이 2011년 이후 12년 만에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찾으면서 한층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협력 방안을 도출해낼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북한 핵 대응 등 공동 안보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것 뿐 아니라 미래 첨단기술, 문화·인적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의제를 설정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해 그간의 동맹 성과를 축하하며 한층 두터운 관계를 약속하는 자리도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보협력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경제 분야다. 특히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두고 우리 정부는 미국의 전향적인 자세를 끌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미국은 자국 반도체 생산을 장려하겠다는 목적으로 총 527억 달러(약 69조원) 상당의 보조금 정책을 발표했다. 대신 단서 조항을 주렁주렁 달았는데, 초과이익을 달성할 경우 미 정부에 일정 금액을 공유해야 하며 주요 반도체 생산 제품과 생산량, 주요 고객도 기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군사용 반도체 개발과 공급에 협력할 기업은 우대하겠다고 해 사실상 '반도체판 노예계약'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보조금을 받으려면 법인세 뿐 아니라 각종 명목의 이익까지 뜯겨야 하는 이중과세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또 미국이 원하면 반도체 생산·연구시설까지 공개해야 하는 기술 안보 리스크도 짊어져야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은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앞으로 10년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 반도체 투자를 금지하도록 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무산시키고 반도체 생태계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겠다는 미국의 거친 움직임에, 한국 기업들은 팔다리가 모두 잘린 채 미국의 종속 기업으로 전락할까 우려하고 있다.
보조금을 포기하면 가격 경쟁력에서 핸디캡을 감수해야 하고, 그렇다고 보조금을 받자니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미국의 압박을 민간기업들이 감당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정부 주도로 '절묘한 균형'을 끌어내야 하는 긴박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그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 미국측의 우호적인 협력 없이 반도체지원법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한국 반도체는 당연히 휘청거릴 수 밖에 없고 경쟁사들은 그 틈을 치밀하게 파고들려 할 것이다.
반도체 패권 다툼 속 반도체 산업 중심축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시스템 반도체로 옮겨가고 있다. 메모리에서는 선두주자이나 파운드리·팹리스에서는 경쟁국에 밀리고 있는 한국 반도체는 하루 빨리 역량 강화에 나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같은 기술·투자는 보조금을 무기로 내건 독소조항이 제거돼야 가능하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우리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는데서 정부는 무거운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 문제가 될 수 있는 항목은 양보를 받아내는 대신 미국에 중장기 투자를 약속하는 등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통령실은 브리핑을 통해 "한미동맹이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더욱 능동적으로 진화해 나가기 위한 역사적 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도 기대하고 있다. '한·미 동맹 강화'라는 표면적, 과시적 미사여구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반도체 기업들을 살릴 구체적이고 실리적인 성과를 가져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