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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의거인가? 혁명인가?


입력 2025.04.15 07:07 수정 2025.04.15 07:07        데스크 (desk@dailian.co.kr)

첫째,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무엇

둘째, 4·19 이후의 과제는 무엇

셋째,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 달라

넷째, 진보 진영에 대한 평가가 달라

ⓒ데일리안 DB

며칠 뒤면 4·19다. 이제 65주년이 된다. 65년이 지났지만 4·19는 여전히 첨예한 논쟁 중이다. 논쟁의 핵심에는 4·19가 의거인가? 아니면 혁명 그것도 미완의 혁명인가 하는 점이다.


보통 의거라고 할 때는 어떤 연속적인 정치과정이 있었는데 잠깐 문제가 생겨 의거를 통해 문제가 해결된 뒤 다시 정치과정이 진행된다고 느끼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승만-박정희 정권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이 되고 4·19는 이 과정에 돌출적인 어떤 사건이 된다. 반면 혁명이라고 할 때는 4·19를 통해 4·19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체제가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혁명을 넘어 ‘미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4·19는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시원 정도의 의미가 있다.


필자는 아래에서 의거와 혁명이 갖는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4·19가 무너뜨린 체제 즉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은 UN과 국제사회의 감시와 승인 속에 탄생했고 제헌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약간의 사회민주주의적 색채를 담고 있다.


즉 이승만 정권은 본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정권이었는데 정국 운영과정에서 이승만의 장기 집권 야욕에 따라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4·19는 주로 이승만의 장기 집권 야욕을 분쇄한 것이다. 이 경우라면 역사적 궤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장기 집권 야욕-보다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되는 것이고 4·19는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 야욕을 저지한 ‘의거’가 되는 것이다.


반면 혁명 더 나아가 미완의 혁명이라고 할 때는 보통 이승만 정권을 극우 반공 체제, 보수 반공 체제라 규정한다. 이 경우라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기 때문에 48년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의 본질이 그렇다는 의미를 깔고 있다.


따라서 4·19는 이승만 정권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이 경우라면 역사적 궤적은 ‘보수 반공 체제-4·19 혁명-새로운 역사적 과제의 수행’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둘째, 4·19 이후의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혁명이라고 한다면 보수 반공 체제가 있고 4·19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하여 보수 반공 체제의 일각을 무너뜨렸다는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는 시작이고 근본적인 다른 무엇이 있게 되는데 이는 대부분 민족통일이다. 따라서 한국사는 4·19를 기점으로 새롭게 민족통일을 향한 대장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의거라고 한다면 4·19를 통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 야욕을 꺾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정상화된 조건에서 앞으로는 산업화·근대화 같은 과제가 남게 된다.


셋째, 둘째에 기초하여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민족통일이 근본적인 과제라고 한다면 반공을 제1국시로 하여서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4·19 직후 혼란한 틈을 타서 이승만 보수 반공 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반면 4·19 이후의 과제가 조국 근대화라고 한다면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권과 4·19를 계승한 것이 되고 적어도 4·19와 배치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4·19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영일은 한 강의에서 4·19로 학생운동의 역사적 임무는 끝났고 이후에는 새롭게 등장한 ‘전문 관료집단’이 역사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문 관료집단과 유사한 집단에 혁신적인 군부가 포함될 것이다.


2차 대전 직후 신생 독립국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민족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취한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나세르, 미얀마(버마)의 네윈 등이 그런 인물인데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도 2차대전 이후 출현했던 혁신적인 군부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이영일의 주장은 4·19 이후 근대화·산업화를 추진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진다.


넷째는 진보 진영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진보 진영은 4·19 당시 대학생으로 이에 참여한 뒤 반유신, 5.18, 6월 항쟁을 거치며 세력화되었다가 김대중 정부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선다.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 부르고 민족통일을 향한 장구한 역사적 여정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진보 진영의 탄생과 성장 과정에 대한 일종의 건국 신화 같은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하는 글이 있다. 4·19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김정남은 ‘4·19 혁명’(2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4월 혁명의 이념과 정신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와 부정을 뛰어넘는 것으로 제1공화국의 잘못된 출발에 대한 거부뿐 아니라, 처음부터 바로 세워졌어야 할 공동체의 이상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4월 혁명은 우리 공동체가 반드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고향이요. 시원으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상이요 목표라고 설파했다. 한마디로 4·19는 이 민족의 정기요 생명”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사건·인물·대상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어떻게 명명하는가에 따라 반쯤은 결정된다.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저변에는 이승만 정권을 친미 보수 반공 체제로 규정하고 4·19 이후 자신들의 성장과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진보세력의 역사관·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


역사 재해석은 정치투쟁의 서곡이다. 70년대 후반 해전사(해방 전후사의 인식)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자양분을 제공한 것처럼 민주화 시대가 은연중에 유포했던 역사관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사상적 토대가 될 것이다.

글/ 민경우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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