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먼 도시에 사는 한 관객분의 이야기입니다. 뉴욕으로 혼자 휴가를 오면서 열 개의 공연 티켓을 예매했고, ‘어쩌면 해피엔딩’이 다섯 번째 공연이었는데 공연을 보는 내내 집에 있는 아내가 그리워져 남은 공연 표를 모두 팔고, 비행기표를 바꾸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아내를 보러 일찍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밸런타인데이에 아내와 함께 뉴욕에 와서 다시 이 공연을 함께 보기로 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으로 느껴졌습니다.”
박천휴 작가는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인 토니 어워즈에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뮤지컬 신작 작품상·연출상·극본상·음악상·남우주연상(뮤지컬)·무대디자인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했다. 박 작가는 화려한 수상 소감 대신, 작품이 관객의 마음에 닿았던 한순간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2014년 아이디어가 싹튼 이래 10년간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다듬어온 작품이 얻어낸 쾌거의 의미를 그는 ‘관객과의 공감’과 ‘성실한 과정’에서 찾고 있었다.
박 작가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성공이 파트너 윌 애런슨과의 유기적인 협업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윌을 ‘작곡가’로 호칭하지만, 미국에서는 저희 둘 다 ‘writer’(작가) 즉, ‘쓰는 사람’이라고 불린다”며 “음표든 활자든 구분하지 않고 함께 이야기를 짓고, 음악의 정서와 질감을 정하며 작업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단순한 역할 분담을 넘어선다. 17년 지기 친구로서 쌓아온 깊은 신뢰와 서로의 예술관에 대한 존중이 그 바탕이다. 박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나 정서에 비슷한 면이 많다”며 “‘내가 할 일’ ‘네가 할 일’을 구분하지 않고 작업의 고통과 즐거움, 성장의 순간을 거의 매 순간 함께해 왔다”고 밝혔다. 이러한 긴밀함이 ‘어쩌면 해피엔딩’ 특유의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을 빚어낸 원동력이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며 새로운 옷을 입었다. 가장 큰 변화는 한국의 소극장 무대와는 다른 스케일이었다. 외형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한국 버전에선 암시적으로 표현됐던 장면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추가하고, 반대로 일부 대사와 넘버는 과감히 축약하거나 생략했다.
“한국 공연은 무대 전환이 거의 없는 반면,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매우 많은 무대 전환과 효과가 쓰입니다. 또 배우와 오케스트라의 숫자도 늘어났죠. 한국 버전에는 암시만 되고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 장면을 브로드웨이 버전에서는 추가하기도 했죠. 모두 오랫동안 수정 작업을 거치며, 최대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한 시도들이었습니다.”
토니상 수상 당일은 영광의 순간이기 이전에, 석 달간 이어진 ‘어워즈 시즌’이라는 긴 마라톤의 끝이었다. 브로드웨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아시아 작가로서 그는 작품을 알리기 위해 직접 발로 뛰어야 했다.
“미국 영화계처럼, 공연계에도 ‘어워즈 시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 악수를 하고 다녔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으니, 제가 얼굴을 비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요. 토니 어워즈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석 달 동안 뛴 마라톤의 피니시라인에 다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고요.”
그래서 박 작가는 시상식 당일의 기분을 “피곤함과 설렘, 걱정과 흥분 등 모든 감정이 뒤섞인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7시간에 걸친 시상식이 끝난 지금, 그는 “한 명의 창작자로서 생활이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라며 “지난 10년의 여정을 좀 더 뿌듯하게 마무리한 것 같아 기쁠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을 비롯해 ‘고스트 베이커리’ ‘일 테노레’ 등 그의 작품은 유독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스물다섯에 미국 유학을 갔기 때문에, 아직도 영어를 할 때 종종 한국식 액센트가 나와요. 뉴욕에 와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훨씬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와 윌이 만든 ‘일 테노레’의 1930년대, ‘고스트 베이커리’의 1970년대를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는 친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선 질감의 세상을 선보이고 싶었고, 해외 관객들에게는 낯설지만 묘하게 공감되는 세상을 선보이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박 작가의 시선은 이미 다음을 향하고 있다. ‘일 테노레’와 ‘고스트 베이커리’의 미국 공연을 위한 대본 수정 작업을 계획 중이며, 오랫동안 구상해 온 뉴욕 배경의 단편 영화 프로젝트에 대한 의지도 내비쳤다. 한국에서의 활동 계획도 구체적이다. 신작 ‘일 테노레’와 ‘고스트 베이커리’의 재공연을 준비하고 있으며, 아직 발표되지 않은 TV 드라마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또한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처럼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좋은 작품을 직접 번역하고 연출하는 작업도 계속할 예정이다.
그리고 올해 10월 30일부터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어쩌면 해피엔딩’ 10주년 기념을 앞두고 있다. 박 작가는 “극장이 더 큰 무대로 바뀌면서 시각적인 요소에 필요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과거에 함께했던 배우분들이 다시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조심스럽게 가져본다. 십 년간 이 작품의 여정을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행복한 공연이 될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약속했다.
“어떠한 이야기를,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과 의지가 계속되는한 꾸준하고 진중하게 작업을 이어가는 창작자이고 싶습니다. 제 평생 서울과 뉴욕에서 보낸 시간이 이제 거의 50:50에 가까워지고 있는데요, 두 문화와 언어를 오가는 창작자로서, 조금은 다른 관점이되, 많은 분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의미가 있을 이야기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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