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성 불인정으로 법적 보호 못 받아
중상 후 치료비 및 고통 오롯이 개인이 감당
"노동자 안전은 선택 아닌 필수...제도적 안전장치 마련 시급"
화려한 조명과 압도적인 무대 장치 속에서 K-컬처의 위상을 드높이는 공연 산업은 외형적 성장의 정점에 다다랐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을 수상하고, 케이팝(K-POP)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순식간에 티켓이 매진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선 정작 무대의 위, 아래에서 땀 흘리는 예술인들의 안전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실수’나 ‘불운’의 영역이 아닌, 제도적 사각지대가 낳은 구조적인 비극이라는 점이다.
ⓒ중대재해전문가넷
최근 몇 년간 발생한 무대 사고는 안전 불감증의 현주소를 참담하게 보여준다. 특히 지난 2023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페라 리허설 도중 중대 사고를 겪고 투병하던 성악가 고(故) 안영재 씨의 사망 소식은 공연계 안전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다시 제기케 했다. 당시 안 씨는 리허설 중 300~400kg에 달하는 무대 장치 구조물이 떨어져, 머리와 목을 맞고 하반신 마비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결국 사고 2년여 만에 숨을 거뒀다.
사고의 인과관계에 대한 법적 다툼을 차치하더라도, 고인이 사고 후 겪어야 했던 고통과 막대한 치료비를 오롯이 개인이 감당했다는 사실은 미비한 사회 안전망에 대한 구조적 씁쓸함을 안긴다. 세종문화회관 측이 단체 상해보험을 통해 보상을 진행했다고는 하나, 이는 산재보험과 같은 국가적 안전망이 아닌 일회성 대응에 불과하다. 그의 죽음이 남긴 묵직한 질문은 ‘국가를 대표하는 대형 공연장의 무대 위에서 일하다 입은 중상에 대해 왜 노동자로서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이다.
이와 유사하게, 지난 8월 세종예술의전당에서 무용수 두 명이 리허설 도중 3m 아래의 오케스트라 피트로 추락해 중상을 입은 사고 역시 예술인 안전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이들 중 한 무용수는 장기 손상과 골절로 비장 절제 및 대장 일부를 절제하는 네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으며, 무용수로서의 활동은 물론 일상생활까지 불투명해진 상황에 놓였다. 사고 당시 무용수들은 피트 하강에 대한 안전 교육이나 명확한 고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수술과 간병에 든 수천만 원의 비용도 가족들이 모두 감당해야 했다. 공연 단체가 계약서상 의무인 상해보험 또는 산업재해보상보험에 가입하지 않아서다. 공연 관리 주체(세종시문화관광재단) 역시 보험 가입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공연계에 만연한 ‘보험 미가입 관행’의 민낯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참극 속에서 예술인들이 가장 크게 좌절하는 지점은 바로 ‘프리랜서’라는 법적 지위다. 현행법상 대다수의 공연예술인(배우, 무용수, 스태프 등)은 사업주와 근로계약이 아닌 ‘문화예술용역 계약’을 체결하는 ‘특수고용형태 종사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근로자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인 ‘종속성’(지휘·감독 및 근로시간의 구속)이 약해 법적으로 ‘근로자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적 근로기준법과 산업재해보험법의 온전한 적용을 받기 어렵다. 그 결과 해고 보호, 퇴직금, 유급 휴가 등 근로기준법상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4대 보험 중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도 사업주가 절반을 부담하는 직장가입자가 아닌 지역가입자로서 보험료 전액을 스스로 부담한다.
다만, 2020년 말부터 시행된 예술인 복지법에 따라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에는 특례가 적용되어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반 근로자와 달리 보험료의 일부를 예술인 본인이 부담해야 하며, 예술 활동 증명 등 별도의 가입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다. 사고를 외부에 공론화하거나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기 어려운 업계의 낡은 관행 때문이다. ‘부상’을 ‘투혼’으로 미화하는 현 공연 제작 환경은 예술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에 익숙하다. 촉박한 리허설 일정 속에서 안전한 리허설이 생략되기 일쑤이며, 사소한 부상에도 쉬지 않고 무대에 오르도록 압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결국, 무대에서 부상을 입은 예술인은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비로 치료하고, 그 기간 동안 소득이 끊기는 이중고를 겪는다. 이는 ‘예술을 위한 희생’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공연 산업의 외형적 성장 뒤에 숨겨진 무대 위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방치된 처참한 현실이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공연 산업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대 위 노동자의 안전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하고, 이들을 법적 사각지대에서 구출할 제도적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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