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은 깨졌고 건물은 팔았다…그래도 '전략'이라는 LG에너지솔루션 [기자수첩-산업]

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입력 2025.12.31 07:00  수정 2025.12.31 07:00

'수주 잔고 1000조' LG엔솔, 연이어 대형 수주 '공중분해'

사측은 "불확실한 고객사 정리" "자본 효율성 제고"로 설명

신용등급 하향과 주가 하락으로 시장 반응 확인

완성차 전기차 전략 수정과 ESS 시장 전망 불확실성 확대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불과 2년 전 국내 배터리 산업은 '수주 잔고 1000조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며 축배를 들었다. 완성차 업체들이 줄을 서서 배터리 공급을 요청하던 이른바 '슈퍼 을(乙)'의 시대였다. 십수 년 치 일감을 미리 확보했다는 소식은 곧장 공격적인 증설 경쟁으로 이어졌고 시장은 배터리가 '제2의 반도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신화의 주역인 LG에너지솔루션은 이제 또 다른 의미로 전무후무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한때 성장의 훈장이었던 수주 잔고는 OEM의 변심 앞에 무력해졌고 이를 토대로 세워진 생산 기지는 기업의 재무적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정리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기류 변화는 최근 열흘 사이 공시창을 장식한 약 13조5000억원 규모의 수주 증발과 핵심 생산 기지의 건물 매각 소식을 통해 느낄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17일 미국 포드의 전기차 모델 생산 중단 결정에 따른 계약 해지(9조6000억원)와 26일 FBPS와의 계약 해지(3조9000억원)를 공시했다. 이어 LG에너지솔루션은 24일 혼다와의 미국 오하이오 합작 배터리 공장 건물을 혼다 미국 법인에 매각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이런 발표들에 따른 LG에너지솔루션의 설명이다. FBPS와의 계약 해지에 대해서 사측은 "불확실한 고객사 정리"라며 "투자 손실과 추가 비용 발생은 없다"는 설명을 내놨다. 배터리 공장 건물 매각에 대해서는 "자본 운용 전반의 효율성 제고"라고 부연했다.


지난해 매출액 절반이 넘는 규모가 증발하고 합작 생산기지 건물을 판매한 것을 두고 '전략적 재편'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이런 세련된 화법은 혼란스럽다. 해지 사유가 명백히 '고객사의 통보'임에도 불필요한 군살을 뺀다는 능동적 판단처럼 포장하고 있어서다.


한 업계 관계자도 이를 두고 '아전인수'격 해석이라고 꼬집었다. 해지된 규모가 한 해 매출의 절반을 넘는 상황에서 고객을 선별해 정리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태는 '슈퍼을'이라 믿었던 배터리 제조사가 OEM의 경영 전략 수정에 얼마나 무력하게 대응할 수 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을의 비애'에 가깝다.


더욱 기이한 것은 자산 매각의 형태다. 설비만 유지한 채 건물만 매각하는 구조는 배터리 업계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긍정적으로는 비핵심 자산을 처분해 유동성을 확보한 결정으로도 볼 수 있으나 합작법인 내 자산 비중 축소를 감수하면서까지 현금을 수혈해야 하는 절박함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신호로도 읽힌다.


이 같은 재무 부담의 신호는 외부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달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무디스는 LG에너지솔루션의 신용등급을 Baa2로 한 단계 강등시켰다. 주요 사업 부문의 실적 부진으로 부채 증가가 예상돼서다.


실제 시장은 더욱 냉철하게, 적나라하게 그 여파를 드러낸다. 공시 전 45만원대 수준이었던 주가는 현재 37만원까지 내려왔다.


이렇듯 대형 계약들이 깨지고 이례적으로 건물을 파는 시점에서 "재무적 실익에 영향이 없다"는 논리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 당장은 맞는 설명일지라도 중장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배터리 산업에서 수주와 증설은 뗄 수 없는 패키지로 완성차 업체와의 장기 공급계약은 사실상 투자 판단의 핵심 근거다. 확정 물량이 줄어들면 가동률과 고정비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사라진 물량만큼 다른 고객사 물량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가능하다면 문제 없겠지만 여건이 녹록지 않다. 테슬라, GM, 포드, 폭스바겐 등 주요 고객사들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에 백기를 들고 전기차 전략을 수정하고 있어서다.


또한, 최근 배터리 업황 악화의 탈출구로 거론되는 에너지저장장치(ESS)도 당장의 '구원 투수'가 되기엔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현재 사업 매출 비중이 전체의 10% 내외에 불과하고 시장의 성장세마저 당초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패배적 상황을 유리한 측면으로 가공하고 포장하는 LG에너지솔루션의 화법은 전형적인 '스핀닥터'식이다.


기업이 시장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비즈니스 전략상 지극히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를 단순히 긍정의 언어로만 통역하는 것은 아쉽다. 그 수사가 본질을 가리고 투자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그것은 전략이 아닌 불신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포장지 대신 구체적이고 투명한 설명이 뒷받침된다면 시장의 신뢰를 발판 삼아 다시 1000조 신화를 뛰어넘는 기업으로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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