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5센티미터' 시간의 잔혹함을 통과한 첫사랑, 오쿠야마 요시유키의 재해석 [D: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3.02 14:01  수정 2026.03.02 14:01

2011년 캐논 신세기 사진 공모전 우수상을 받고 데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원작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는 시절의 잔상을 간직한 채 각자의 속도로 멀어지는 타카키와 아카리의 그리움을 그린 수작이다. 이 시린 첫사랑의 연대기를 실사화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이는 일본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1991년생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이다.


ⓒ㈜미디어캐슬


2011년 제34회 캐논 신세기 사진 공모전 우수상으로 데뷔한 그는 포카리스웨트 광고와 사진집을 통해 국내에서도 탄탄한 인지도를 쌓았다. 이후 요네즈 켄시, 호시노 겐 등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아 독보적인 영상미를 증명해 온 그가 장편 데뷔작 '엣 더 벤치'에 이어 차기작 '초속 5센티미터' 메가폰을 잡았다.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은 원작의 섬세한 정서를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미장센으로 원작과는 또 다른 결의 감동을 실사 화면에 덧입혔다.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이 원작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때 마주한 '초속 5센티미터'는 오랜 시간 그의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 잡았다. 연출자가 되기 훨씬 전, 관객으로서 경험한 이 애니메이션은 창작자로 성장하는 과정에 또렷한 자국을 남겼다.


"고등학생 때 DVD로 원작을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느꼈던 건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점이었어요. 한 사람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데, 결과적으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실로 이어지더라고요. 개인의 이야기가 세계로 확장되는 그 병렬 구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작품이 존재할 수 있구나' 싶었죠. 그리고 감독이 된 후 이 영화를 만들기로 할 때 스태프와 연기자분들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솜털 하나를 끈질기게 바라보다 보면, 그 안에서 세계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요. 아주 사소한 디테일을 클로즈업해서 그 안에서 거대한 우주를 발견하는 감각, 그런 보편적인 진실이 전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1991년은 타카키와 아카리가 태어난 해이자, 감독 오쿠야마 요시유키와 주제곡을 부른 뮤지션 요네즈 켄시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 숫자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운명처럼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지 모른다.


"이 영화를 만들 때가 딱 서른세 살이었는데요. 흔히 미드-에이지 크라이시스(Mid-life Crisis)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이와 완전한 어른 사이의 그 모호한 중간 지점 말이죠. 30대 전후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공존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안개에 휩싸인 듯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몰라 초조해하는 세대죠. 흥미로운 건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이 원작을 만드셨을 때 연령대도 딱 그 정도였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저희 세대가 느끼는 절실한 실감과 불안을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할 수 있었기에, 1991년생들의 이야기를 실사로 그려내는 작업이 더 성공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쿠야마 감독에게 실사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정서를 현재의 몸으로 다시 통과시키는 작업이었다. 애니메이션이 지닌 감정의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는 인간과 시간의 질감을 덧입혀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그는 원작을 존중하는 태도와 동시에,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정해둔 원칙이 있었어요. 원작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깊게 파고드는 면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원작자는 아니지만, 실사화 과정에서 저의 개인적인 인생도 어느 정도 투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태프들에게도 각자가 가진 원풍경을 떠올리며 영화 어딘가에 녹여내자고 당부했죠. 저는 원작이 가진 고유한 위치를 지키면서도, 실사로서 재구축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 만남과 이별을 단순히 기적이라 표현하기엔 너무 평범하니 그보다는 만남과 이별이 가진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시대를 잇는 모티브들을 적극 활용했어요. 예를 들어 골든 레코드는 과거 아카리에게 들었던 기억이 현재 과학관에서 작품으로 재회하며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죠. '초속 5센티미터'라는 단어 자체나 목소리의 잔향 등 시간을 초월해 연결되는 구성에 공을 들였습니다."



ⓒ㈜미디어캐슬

원작의 감성을 실사로 완벽하게 이식하기 위해 오쿠야마 감독은 집요할 정도의 분석 과정을 거쳤다. 애니메이션의 모든 컷을 분석한 200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제작하는 기술적 노력은 물론, 주인공 타카키라는 인물에 감독 자신의 감수성을 덧입히는 작업에도 몰두했다


"애니메이션의 모든 컷을 캡처해서 분석했습니다. 카메라의 움직임, 줌 등 하나하나 파악했죠. 특히 신카이 감독님 특유의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필터를 썼는지 분석하며 200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20년 전의 화각을 그대로 쓸지, 바꿀지도 고민했고요.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가장 핵심은 타카키라는 인물에 저 자신을 얼마나 덧칠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신카이 감독님이 투영된 타카키 위에 저의 감성을 얹고, 배우 마스무라 호쿠토의 연기와 요네즈 켄시의 노래가 겹겹이 쌓여 하나의 정서가 완성됐어요. 원작과 실사를 관통하는 공통된 정서는 그런 치밀한 계획과 몰입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3부작 옴니버스 형태였던 원작의 구성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낸 것은 실사 영화만의 호흡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다.


"시대를 오가며 보여줌으로써 주인공 타카키가 겪는 변화를 더 명확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의 무게감과 잔혹함을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눈빛이 시간이 흘러 회사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만 바라보며 프로그래밍하는 삶으로 변해버린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하는 의문과 함께 시간의 힘이 가진 잔혹함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세 가지 시절을 중첩해 구성했습니다."


그의 연출에서 감정은 배우의 얼굴과 대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공기와 빛, 계절의 결이 감정을 말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오쿠야마 감독은 풍경을 배경이 아닌 감정의 매개로 설계했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속도나 눈이 내리는 방식은 정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풍경이 인물의 감정과 연결되어야 했거든요. 예를 들어 타카키와 아카리가 밤의 벚나무 아래에서 키스하는 장면은 그들에게 영원 같은 1초잖아요. 그래서 그 순간의 눈은 실제보다 훨씬 천천히 내리도록 연출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게 아니라, 감정에 맞춰 풍경의 속도를 조절한 거죠. 또 우리 일상에서 하늘이나 빛을 보며 문득 애절하거나 기쁜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영화에서도 단순히 인물의 연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풍경을 통해 그 인물의 풍성한 감정을 투영하고 싶었습니다. 인간 중심으로만 찍기보다, 혼자서 창밖을 보거나 거리를 걷는 일상의 리듬감을 담아내어 관객들이 그 풍경 속에서 인물의 고민과 슬픔을 함께 느끼길 바랐습니다."


칸영화제에서 '마이 선샤인'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은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과 형제 사이라는 점은 창작자로서 흥미로운 배경이다. 형제로서의 경험이 이 작품에 스며든 흔적은 없는지, 나아가 두 사람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날 가능성은 없는지 물었다.


"의식적으로 가족 경험을 넣으려 한 건 아니지만, 진지하게 임하다 보니 제 인생의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됐을 겁니다. 제가 형으로서 동생 히로시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것들이요. 예를 들어, 극 중 언니가 여동생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컷은 원래 대본에 없던, 배우의 쉬는 모습을 우연히 찍은 것이었는데 편집 때 넣었습니다. 제가 동생을 볼 때 느끼는 공감이 투영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동생과 감독과 조감독 등의 사이로 광고 같은 건 찍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영화적 사고방식이 달라서 공동 연출은 상상이 안 가네요. 그래도 기회가 온다면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평소 한국 영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그는, '초속 5센티미터'가 한국의 관객들과 만나는 모든 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영화제나 상영회 등으로 한국을 찾으며 매번 귀한 경험을 쌓아왔지만, 이번 작품으로 관객분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는 시간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아직은 그 뜨거운 반응을 온전히 다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직접 마주했던 순간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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