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탄 쥐 – 작서의 변 [정명섭의 실록 읽기㉛]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3.03 14:00  수정 2026.03.03 14:00

조선 중종 22년(1527년) 3월 22일, 좌의정 이유청과 우의정 심정 등이 임금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고한다.


듣건대 동궁(東宮)에 요괴로운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지극히 경악스러운 일로 어찌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경복궁 전경 ⓒ직접 촬영

해당 날짜 실록의 기사 일부이다. 신하들에게 보고를 받은 중종은 깜짝 놀랐다. 요사로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과 궁중 안에서 벌어진 일을 자신이 아니라 신하들이 먼저 알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사지와 꼬리가 잘린 채 눈과 입, 귀가 불로 지진 쥐 한 마리가 동궁전의 창밖 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발견된 2월 25일은 세자의 열 두 번째 생일이었다. 더군다나 3월 초하루에는 중종이 거처하는 대전 침실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우의정 심정이 이 사실을 보고받고 좌의정 이유청과 함께 중종에게 아뢴 것이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임금과 세자를 저주한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역모에 해당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범인을 찾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CCTV나 블랙박스가 없던 시대라서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물론 궁중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바로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였다. 상주의 한미한 집안 출신인 그녀는 궁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으며,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 4년에는 왕의 첫 번째 아들 복성군을 낳았고, 이후 혜순옹주와 혜정옹주까지 낳으며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문제는 그녀의 야심이었다. 중종 10년, 장경왕후가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경빈 박씨는 자신이 왕비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만약, 경빈 박씨가 왕비가 되었다면 복성군이 원자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기에 세자가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이 다음 중전은 미천한 출신이 아닌 명문에서 구해야 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중종 12년, 문정왕후 윤씨가 새로운 왕비로 간택되면서 경빈 박씨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배경 때문에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모두들 경빈 박씨를 의심했다.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결국 중종 2은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서인으로 강등하고 경빈의 고향인 상주로 보냈다. 이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신하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처벌을 요구했다. 결국, 경빈 박씨는 폐서인이 되었고, 복성군 역시 작호를 빼앗긴 채 충청도 태안으로 유배되었다.


그렇게 6년이 흐르고, 중종 28년인 서기 1533년 4월, 동궁 빈청 남쪽에서 또다시 기괴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바가지로 사람 머리 모양을 만들어 종이로 싸고 머리카락을 그린 뒤 눈과 코, 입을 새긴 인형이었다. 거기에 목패를 달아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아버지의 몸을 교살할 것', 그리고 '중궁을 참할 것'이라는 저주의 글까지 적혀 있었다. 가짜 머리라는 뜻의 '가작인두의 변'이었다. 조정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조사를 하던 중에 경빈 박씨의 둘째 딸 혜정옹주의 남편 홍여의 하인들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결국, 배후에 경빈 박씨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이번에야 말로 확실히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끝까지 버티던 중종은 결국 경빈 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에게 사약을 먹여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용의자인 혜정옹주의 남편 홍여 역시 극심한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고, 혜정옹주는 작호를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한때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비 후보로까지 올랐던 경빈 박씨와 세자가 될 뻔 했던 복성군은 명백한 증거도 없이, 단지 그럴 만한 동기가 있다는 이유 만으로 죽어야 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서기 1532년인 중종 27년 3월, 이전에 상소문을 올린 일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상소를 올린 일로 의금부에 끌려온 이종익이 다시 상소문을 올려서 '작서의 변'은 경빈 박씨와 복성군의 소행이 아니라 권신인 김안로의 아들인 김희가 아버지와 함께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다.


김안로는 중종의 신임을 받던 권신으로 '작서의 변'이 일어나고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계에 복귀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김희는 이미 죽었고, 김안로는 당대의 권신이었다. 이종익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오히려 누명을 씌웠다는 이유로 참수당하고 만다. 훗날, 복성군은 신원이 회복되었지만 경빈 박씨는 끝끝내 죄인의 신분으로 남았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작서의 변'은 단순한 저주 사건이 아니라 왕권을 놓고 벌인 권력 다툼의 축소판이었다. 실제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권신 김안로와 경빈 박씨와 신경전을 벌이던 문정왕후가 지목되고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일을 벌였을 수도 있다. 권력을 놓고 벌이는 왕좌의 게임은 늘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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