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에 숨긴 독침, 무너진 가해와 피해의 경계…연극 ‘말벌’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3.25 08:52  수정 2026.03.25 08:56

로이드 말콤 심리 스릴러...국내 초연

4월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말벌은 타란툴라 거미를 마비시킨 뒤 그 몸에 알을 낳는다. 부화한 애벌레는 산 채로 거미를 파먹으며 자란다. 연극 ‘말벌’(THE WASP)은 이 잔혹한 생태계를 인간의 관계망으로 끌어온다. 20년 만에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여성의 대화는 보통의 ‘안부’가 아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물론 침묵과 눈빛 그리고 모든 감정은 상대를 마비시키고 파먹기 위한 ‘사냥’처럼 느껴진다.


ⓒ해븐프로덕션

영국 극작가 모건 로이드 말콤이 집필한 이 심리 스릴러는 2015년 런던 초연 이후 지난 3월 8일 한국 무대에 올랐다. 극의 배경은 평범한 카페다. 단정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헤더(김려원)와 배가 부른 채 가죽 재킷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카알라(권유리)가 만난다. 학창 시절 이후 20년 만의 재회다.


헤더는 겉보기엔 모든 것을 갖췄다. 하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고 남편과의 관계가 식어가면서 내면이 무너진 인물이다. 고립된 일상 속에서 그가 떠올린 건, 오랜 친구 카알라다. 빈곤과 잦은 임신 속에서 거칠게 살아남은 카알라와의 만남에선 어색한 기류가 흐르지만, 헤더의 믿기 어려운 제안으로 이 재회는 걷잡을 수 없는 결말을 향해 기울기 시작한다. “내 남편을 죽여줘.”


극은 단 두 명의 배우가 90분간 이끈다. 수식어를 덜어낸 건조한 대화 속에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가 얽힌다. 김려원이 연기하는 헤더는 겉으로는 우아하고 차분하지만, 그 이면에 억눌린 광기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감추고 있다. 흔들림 없는 태도와 서늘한 미소는 극의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단단한 축이다.


ⓒ해븐프로덕션

반면 권유리가 분한 카알라는 날 선 생존 본능 그 자체다. 과거의 가해자였으나 현재는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인물의 모순을 거침없는 에너지로 뿜어낸다. 정제되지 않은 말투와 행동 속에 묻어나는 절박함은 자칫 정적일 수 있는 2인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두 배우의 앙상블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일차원적 구도를 넘어, 시간이 흐르며 역전되는 권력관계를 밀도 높게 증명한다.


단순한 치정극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과거 학창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며 방향을 튼다. 학교 폭력이라는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계급 갈등과 맞물려 두 사람을 옭아맨다. 진실이 드러날수록 상황은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을 거듭한다. 연출은 두 인물이 벌이는 위험한 거래와 심리전을 과장 없이 무대 위에 구현했다. 변화하는 조명과 음악은 인물들의 요동치는 심리를 건조하게 뒤따른다.


극은 파국을 향해 걷는다. 타란툴라처럼 고통의 독침을 품고 살아온 이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극은 섣부른 위로나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에게 진짜 가해자는 누구인지,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진짜 ‘말벌’은 무엇인지 묻는다. 화려한 무대 장치 없이, 오직 텍스트의 힘과 배우의 호흡만으로 긴장감을 엮어내는 수작이다. 공연은 4월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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