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중동 발언…한국경제에는 먹구름
반도체가 버텨도 안심 못 해…성장 흐름 멈출라
장기화 국면에선 재정·기업·가계 부담 확대 불가피
반도체 수출 호조가 경제를 지탱하는 가운데, 중동 리스크로 인한 고유가와 수입 비용 압박이 한국 경제를 ‘취약구간’으로 몰아넣고 있다. ⓒ제미나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내놓은 경제 메시지는 중동 전쟁의 종결 기대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이 더 이상 중동 원유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우며 호르무즈 해협 통항 정상화 부담을 사실상 원유 수입국과 동맹국 쪽으로 넘기는 인식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한국처럼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는 이 발언이 단순한 정치적 메시지로만 들리기 어렵다. 에너지 조달 비용, 물가, 환율, 기업 수익성에 한꺼번에 압박을 줄 수 있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유가만 뛰는 게 아니다…물가와 성장의 동시 압박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위험은 국제유가 상승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3월 글로벌 원유 공급이 큰 폭으로 줄어든 데 이어 4월에는 공급 차질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봤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원유 공급 손실이 인플레이션을 통해 각국 성장률을 깎아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급 충격이 짧게 끝날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국내 지표도 이미 이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2%로 시장 예상보다 낮았다. 그러나 이는 전국 단위 연료 가격 상한제가 단기적으로 상승폭을 눌러낸 영향이 컸다.
같은 달 석유류 가격은 전월 대비 10.4% 올랐고, 한국은행이 기존 전망에서 전제로 둔 유가 수준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이승훈 메리츠증권 이코노미스트는 “3월 물가만으로 안심할 수 없고, 중기적으로는 계속 경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물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제유가 상승은 운임, 항공료, 비료, 화학 원료, 전력 비용을 거쳐 국내 생산비와 생활물가 전반으로 번진다. 한 차례 가격 급등을 눌렀다고 해서 충격 전반이 해소됐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한국 경제는 대중동 원유 의존도가 70% 수준으로 다시 올라가 중동 리스크에 더욱 취약해진 구조를 보이고 있다. ⓒ제미나이
원유 가격과 환율이 함께 오르면 수입물가 압력은 더 커진다.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경제는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 압력을 동시에 떠안기 쉽다.
여기에 구조적 한계도 분명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한국의 대중동 원유 의존 구조가 단기간에 바뀌기 어렵다고 봤다.
유광호 KIEP 세계지역연구2센터 아프리카중동·중남미팀 전문연구원(공동저자)이 작성한 ‘우리나라의 중동산 원유 의존 배경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동 원유 수입 비중은 2015년 82.3%에서 2021년 59.8%까지 낮아졌다. 그러나 2023년 다시 71.9%로 올라선 뒤 최근까지 70% 안팎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유 전문연구원은 “그동안 중동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도입선 다변화를 위한 노력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고 전제한 뒤 “그럼에도 중동이 다른 산유국보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국내 정유설비가 중동산 중질·고황 원유 처리에 맞춰 구축돼 있다는 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동산 원유 접근성이 오히려 커진 점이 겹치면서 의존 구조가 다시 굳어졌다”고 내다봤다.
선심성·일회성 정부 대응으로는 한계…체질개선은 언제쯤
정부는 유가 상한제, 유류세 인하 확대, 긴급 국채 매입, 추가경정예산 편성, 에너지 안보 경보 상향 등의 조치를 잇달아 내놨다.
공공부문 차량 운행 제한도 강화했고, 국제유가가 더 오를 경우 전국 단위 운행 제한 가능성도 열어뒀다. 대응의 속도는 빠른 편이다. 다만 이 조치들이 뜻하는 바는 충분한 해법이라기보다 충격 확산을 막기 위한 초반 방어선에 가깝다.
가격 상한제는 소비자 체감 부담을 낮출 수 있어도 정유사 손실 보전과 재정 부담을 동시에 키운다. 상한제 유지 기간이 길어질수록 시장 가격 신호가 왜곡될 수 있다. 공급 의욕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정부가 여러 카드를 꺼냈다는 점과, 그 카드가 장기적으로 효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결이 다르다.
더구나 중동 리스크가 길어질 경우 필요한 정책은 연료 가격 통제에만 머물 수 없다. 조달선 다변화, 비축유 운영, 나프타·LNG 수급 점검, 석유화학·항공·해운·물류 업종의 유동성 관리, 원화 약세에 대비한 금융시장 안정 조치가 함께 가야 한다.
원유 공급 불안이 운송과 환율, 생산비, 생활물가를 거쳐 성장 둔화 압력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도식화한 해설형 시각물. ⓒ챗지피티
지금의 정책 패키지는 소비자 부담을 급히 누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향후 비용 전가의 2차 파급까지 막는 수준으로 보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 시각이다.
KIEP도 지금 국면에서는 경제성보다 공급 안정성을 앞세워야 한다고 짚었다. 중동발 충격이 커질 경우 비용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확보 가능한 원유 물량을 먼저 잡아야 하고, 중기적으로는 새로운 도입처 발굴과 제도 보완,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믹스 전환과 정유설비 유연성 제고를 단계적으로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동 내 기존 공급선의 대한국 우선 공급 확보, 호르무즈 해협 통항 안정, 러시아산 원유 제재 환경 변화까지 함께 살펴야 하고, 동시에 중남미·아프리카산 원유 도입이 가능하도록 운송비·금융·보험 지원 체계도 손봐야 한다는 지적인 셈이다.
유광호 전문연구원은 “우리나라의 대중동 원유 의존도가 한때 낮아졌지만 최근 다시 70% 안팎으로 올라선 것은 지리적 이점과 정유설비 구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시장 재편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단기적으로는 비용 부담이 있더라도 공급 안정성 확보에 무게를 두고 물량 확보에 나서야 한다”며 “중기적으로는 도입선 다변화,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믹스 전환과 정유설비 체질 개선을 병행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수출 호조가 방패가 되기엔 불안 요인이 너무 많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수출 호조를 근거로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여전히 견고하다고 본다. 실제로 3월 수출은 큰 폭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반도체 수출 덕분이다.
그러나 이 숫자만으로 현재 위험도를 낮게 볼 수는 없다. 같은 시기 중동 분쟁 여파로 수입 증가율 확대와 선적 차질 가능성이 함께 제기됐다.
iM증권 박상현 이코노미스트는 “고유가 영향으로 수입 증가율이 예상보다 더 높아질 수 있다”며 “중동향 선적에도 일부 차질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수출이 좋다는 사실이 경제 전반의 안정을 바로 뜻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환율 변수도 만만치 않다. 원유 가격 상승과 원화 약세가 동시에 진행되면 수입기업 부담은 더 가팔라진다. 결국 한국 경제가 직면한 핵심 변수는 전쟁의 종료 여부 자체보다, 높은 에너지 비용이 얼마나 오래 이어지고 어떤 경로로 국내 경제 전반에 스며드느냐다.
제프 응 스미토모미쓰이은행(SMBC) 아시아 거시전략 총괄은 “이번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수 주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고 브렌트 가격도 단기적으로 높은 수준에 머물 것”이라며 “원화 같은 아시아 통화가 취약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