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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과 종이' 서청원과 김무성이 쓸 편지는


입력 2014.01.29 11:12 수정 2014.01.29 11:20        이상휘 선임기자

<칼럼>얼마나 감동적이며, 설득력이 있는지는 두 사람의 몫

지난 2013년 11월 21일 오후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의 '정치너머의 세상'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와 김무성 의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편지를 쓰고 싶다. 할말이 많다. 연필과 종이를 찾는다. 길고 긴 사연이라 연필은 마음의 각오를 다진다. 종이를 기다린다.

종이는 연필이 부르는 소리는 듣는다. 비로소 필요한 순간이라 직감한다. 서둘러 연필에게로 다가선다. 둘이 만나 사연을 만들어 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슥슥, 잘도 써내려 간다.

연필이 몸을 던지면, 종이가 받아준다. 누군가에게 읽혀질 편지이기에 정성을 다한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보고 감동한다. 또는 실망하기도 한다. 진실인지 아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필과 종이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서다. 어느 쪽도 넘치지 않은 균형이 진실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연필은 동적이며 종이는 정적이다. 연필이 가는데로 종이는 몸을 던지며 적어내려 준다. 종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연필은 엉뚱한 곳으로 갈 것이다. 벽이나 모서리나 바닥 등에서 연필심이 부러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연필도 그러하다. 종이를 필요치 않는다면, 종이는 쓰임없이 버려질 수도 있다. 종이의 가장 큰 쓰임은 연필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 우매한 질문이다.

혼연일체를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세상사 모두가 필요에 의한 만남이다. 그렇치 않는 것은 없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손을 잡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대부분 버릴 때는 손을 잡았을 때의 효과를 망각한다. 이제 소용없다든가 다 써먹었다고 느껴질 때 버린다. 그런데 세상사는 그런게 아니다.

날마다 바뀐다.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 아무도 모른다. 섣불리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다. 함부로 버림을 남용해서는 안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문제는 둘이 싸울 때다. 연필과 종이는 상호 보완적 관계다. 어느쪽도 없으면 한쪽은 아무 소용이 없다. 종이가 있어야 연필이 빛난다. 종이도 마찬가지다. 연필이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로 자기 때문에 편지를 썼다며 우긴다고 치자. 사연을 받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 굳이 누구 때문에 사연이 적혀지고 전해졌는지 알 필요가 있을까. 사연을 받는 사람은 둘의 조화로 적혀진 내용을 읽어볼 뿐인 것이다.

둘이서 이 같은 상황을 오판하고 서로 싸우며 편지를 써도 마찬가지다. 아마 엉망으로 쓰여질 가능성이 높다. 내용보다는 서로의 가치에 더 신경썼기 때문이다. 당연히 받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의미없는 싸움이라는 말이다.

새누리당의 당권을 두고 벌써부터 말들이 새어 나온다. 당의 원로격인 서청원 의원을 비롯해 김무성 의원이 거론된다.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경쟁을 부추킨다.

관심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 박근혜정부의 집권 중반기 이후를 가늠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자칫 불협화음이 발생할 경우 상당한 내분에 휘말리게 된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행보가 관심인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면 복잡하다. 가볍게 생각해보자.

두 사람은 인연이 깊다. 상도동계로 정치적 선후배 관계다. 성향도 직선적이라 비슷하다. 닮은 점이 많다. 그만큼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여지가 넓다는 의미다.

그러나 입장은 다르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행보가 같지 않다. 김무성 의원은 대권도전에 대한 의지가 읽혀진다. 반대로 서청원 의원은 다르다. 박근혜정부의 성공을 위해 당을 견인하기 위한 것으로 비춰진다.

목표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으로서는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김 의원이 대권을 바란다면 서청원 의원과도 관계가 좋아야 한다. 대립이 되어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서 의원 쪽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김 의원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이 부분을 서로 망각할 경우다. 김 의원이 대권을 향한 교두보로 당권을 보고 있을 경우다. 서로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서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모습이냐 아니면 화합하고 보완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냐“이다.

연필과 종이의 모습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정서는 달라진다. 두 사람이 모두 연필이고 종이가 되어서는 편지를 쓰지 못한다. 역할에 따라 양보하고 이해할 때인 것이다. 그래야 국민에게 전해지는 편지가 감동이 되는 것이다.

어느쪽이 연필인지 종이인지는 중요치 않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다. 한 쪽은 당권이요, 다른 한쪽은 대권이다. 상호 보완적으로 보면 될 것이다. 싸워서 득이 될 조합은 아니다.

당의 중심을 지키려는 서청원 의원, 한걸음 더 나아가 대권을 바라보는 김무성 의원.

서로에게는 절대적 필요의 관계다. 서로에게 연필이며 종이인 것이다. 국민은 두 사람의 교감으로 쓰여진 편지를 읽는다. 얼마나 감동적이며, 설득력이 있는지는 두 사람의 몫인 것이다.

이상휘 기자 (shonle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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