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덴헐크는 최고 스피드 155km/h에 이르는 강력한 직구와 너클 커브, 슬라이더를 효율적으로 곁들이며 한화 타자들을 제압했다. ⓒ 연합뉴스
야구선수가 굉장히 잘하는 날, 흔히 '미쳤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평소와 다르게 신들린 타격과 신들린 투구를 한다는 의미다. 이런 날 타자는 '공이 수박만 하게 보였다'라고 하거나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투수의 경우는 두 가지다. '긁혔다'는 표현이 첫 번째.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이 손에서 빠져 나올 때 손바닥에서 손끝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손실 없이 체중 전달이 완벽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강속구 투수의 경우 볼끝의 움직임으로 승부하는 유형의 투수는 긁히는 날 괴력투를 펼치게 된다.
두 번째 표현은 '잡혔다'다. 바로 흔들리던 영점이 잡혔다라는 뜻이다. 구위는 좋지만 제구력에 문제가 있어 경기당 편차가 큰 투수의 경우다. 주로 직구 제구력보다는 변화구의 로케이션이 경기 당일 제구력의 정밀함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개인 최다 '14K' 핀 포인트 제구력
5일 대구구장서 열린 한화전에 선발로 등판, 생애 최다 탈삼진 신기록을 수립한 릭 밴덴헐크는 올 시즌 제대로 긁히고 있고, 이날은 영점까지 제대로 잡힌 날이다. 말 그대로 괴력의 ‘헐크투’가 펼쳐진 날이다. 밴덴헐크는 이날 8이닝 2피안타 1사사구 14탈삼진 무실점의 완벽에 가까운 투구로 시즌 13승(3패)을 달성했다.
밴덴헐크는 최고 스피드 155km/h에 이르는 강력한 직구와 너클 커브, 슬라이더를 효율적으로 곁들이며 한화 타자들을 제압했다. 이날 밴덴헐크의 제구력은 올 시즌 최고였다. 홈플레이트 좌우 모서리를 공략하는 제구력과 우타자를 상대로 사용하는 승부구인 슬라이더, 그리고 낙차 큰 너클 커브까지 포수 이지영이 핀 포인트로 꽂아 넣었다.
밴덴헐크의 작년과 올해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큰 신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투구폼으로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작년 7승 9패로 승보다 패가 더 많은 시즌을 보냈다. 198cm의 큰 키에도 스윙의 궤적이 스리쿼터형으로 형성됐다.
당연히 볼의 스핀도 종속이 좋은 언더스핀으로 형성되지 않고 사이드 스핀이 걸렸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위로 치솟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우타자 몸쪽으로 휘는 공이 많았다. 그 결과 우타자 몸쪽 승부구를 사용하는 데 큰 문제가 발생했다.
몸쪽 투구에 자칫 몸에 맞는 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타자에게 과감한 몸쪽 승부구를 구사하지 못하면서 투피치인 슬라이더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니퍼트와 비슷한 투수를 원하던 류중일 감독으로선 다소 실망할 수밖에 없던 작년이다.
작년 하반기에 투구폼을 교정, 팔 각도를 수정한 뒤 높은 타점을 활용한 투구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 시즌 초 체화되지 못한 투구폼으로 부상이 발생했다. 지난 4월 15일 대구 두산전에서 갑작스런 어깨 통증으로 강판된 것.
한 달 이상의 재활기간 밴덴헐크는 카도쿠라 2군 투수코치와 투구폼 전면 교정 작업에 돌입했다. 바깥쪽 투구시 어깨에 무리를 주는 크로스 스트라이드를 오픈 스트라이드로 바꾸고 팔의 위치를 스리쿼터에서 오버 핸드로 높였다.
당연히 팔의 타점이 올라가면서 릴리스 포인트도 타자 쪽으로 당겨졌다. 공의 회전이 언더스핀으로 형성되면서 볼끝에 힘이 실렸다. 우타자 몸쪽 승부가 가능해졌고 덕분에 주무기인 슬라이더와 너클 커브의 효율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류중일 감독이 원하던 '니퍼트형' 장신 투수가 완성된 셈이다.
부상 복귀 후 밴덴헐크는 진짜 '헐크'가 됐다. 그의 투구에 타자들은 삼진을 연속으로 당했고 헐크는 패배를 잊은 투수로 자리잡아갔다. 하지만 시즌 중반 이후 다시 팔이 내려가면서 릴리스 포인트가 교란되는 경기도 몇 차례 있었다. 5월 이후 압도적인 연승 행진을 기록하다 8월 들어 넥센과 SK전에서 연이어 부진했던 이유도 바로 흔들리던 스윙의 궤적 때문이었다.
5일 한화전에서는 퍼졌던 팔의 스윙이 위로 올라가면서 잃었던 구위와 제구력을 되찾았다. 다시 긁혔고 영점까지 잡혔던 그날 괴력투는 부활했다.
헐크가 옷을 찢고 괴물이 된 계기는 카도쿠라와의 화학적 결합 덕분. 카도쿠라 코치가 현역 시절 높은 타점을 활용한 언더스핀을 극대화한 직구와 포크볼, 그리고 정교한 좌우 로케이션을 구사한 투수였다. 한화전 괴력의 밴덴헐크는 카도쿠라의 아바타다.
밴덴헐크는 올 시즌 리그 최고의 우완으로 자리매김했다. 6일 현재, 승률 1위(0.813)에 올라있다. 이 외에도 투수 부문 타이틀 전 부문에서도 상위 3위 안에 올라 있다. 다승 3위(13승)-평균자책점 2위(3.41)-탈삼진 2위(147)로 좌완 앤디 벤 헤켄(넥센)과 최고 투수 경쟁을 펼치고 있다.
밴 헤켄에게 다승과 탈삼진은 뒤지지만 승률과 평균자책점에선 밴덴헐크가 앞섰다. 관건은 선두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된 탈삼진왕 경쟁. 밴 헤켄은 151개, 밴덴헐크는 한화전 14K를 몰아서 147개로 1위와의 격차를 4개 차로 좁혔다. 벽안의 좌우 에이스가 펼치는 '닥터 K' 경쟁에 불이 붙었다.
올 시즌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던 5월 김시진 롯데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저런 투수가 왜 메이저리그에 있지 않나"라고. 투구폼 교정을 통해 미완성의 릭에서 진짜 헐크로 변신한 괴물투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투의 양면성
경기 후 인터뷰에서 완벽했던 자신의 이날 투구에 대해 묻는 질문에 뜻밖의 답변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경기 중 부상으로 후송된 상대 팀 선수 펠릭스 피에의 부상이 걱정된다"고 말한 것. 피에는 1회말 수비에서 박한이의 중견수 뒤 타구를 잡다가 펜스에 부딪혀 병원으로 후송됐다.
피에의 부상을 승리의 기쁨에 앞서 언급한다는 것은 배려의 극치다. 그것도 팀 동료도 아닌 상대팀 선수였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 깊다. 마운드에선 밴덴헐크는 괴물 그 자체였지만 마운드에서 내려온 밴덴헐크는 녹색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돌아왔다. 예의바른 야구인이 되어 있었다.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는 마운드 위와 아래의 모습이 사뭇 달랐다. 심지어는 트레이너의 득남 소식까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추가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완벽투보다 주변을 더 챙기기에 노력했다.
삼성 류중일 감독으로선 내심 밴덴헐크의 완벽투가 기쁘지만 기쁘지가 않다. 너무 잘 던져서 탈이다. 밴덴헐크가 급성장하면서 내년 메이저리그 복귀나 일본에서 헐크를 낚아채 갈 수도 있기 때문. 실력은 물론 인성까지 흠잡을 데 없는 밴덴헐크를 내년에도 잡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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