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와 하나회와 규제와 싸우고 YS는 떠났다
정치·경제분야 부패와 전면전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 공개하고 금융실명제 실시
‘결단의 지도자’, ‘최연소·최다선 국회의원’ 등 화려한 수식어를 뒤로 하고 22일 새벽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은 ‘부패 척결’ 분야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김 전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가장 먼저 칼을 댄 건 ‘부패 정치’였다. 당시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로 사회 전반에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있던 만큼, 그는 고위 공무원이 재임기간에 재산을 부당증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법적으로 공개토록 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 자신부터 재산을 공개하고, 정치자금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공개선언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정부패와 12.12 쿠테다의 책임을 물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이에 따라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검찰의 수사를 받고 1997년 대법원에서 군사반란 및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 받았다. 노 전 대통령도 내란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의 형이 확정됐다. 다만 이들은 같은 해 12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또한 1979년 12.12. 쿠테타를 주도한 후 정치권과 결탁해 군 전체를 장악해온 사조직 ‘하나회’도 전면 해체시켰다. 아울러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철거하는 한편, 독재정권 당시 비밀·거대 권력을 상징하던 청와대 안가를 철거하고 청와대 앞길도 개방하는 등 대한민국 ‘문민 시대’ 도래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금융·부동산 실명제로 과세투명성 확보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하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했다. ‘변화와 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금융·부동산 시장의 양대 실명제를 시행한 것은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 확보가 경제 성장의 첫 걸음이라는 판단에서다.
당시 금융거래에서 가명이나 차명을 사용하는 등 각종 비리와 부패 사건이 이어졌고, 이에 투명성 재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제기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며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이같은 금융 투명성 재고 정책은 부동산 시장으로 이어졌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면서 불법 자금이 투기를 통해 부동산에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에 김 전 대통 1995년 1월 6일 부동산 실명제 실시 계획을 발표, 각종 입법 절차를 약 3주 만에 거쳐 본격 도입됐다.
'세계화’ 흐름 맞춰 OECD 가입...규제개혁에도 앞장
세계화 추세에 맞춰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국민적 자부심을 높이는 동시에 규제 개혁에도 나섰다.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산업구조도 다양해지면서, 정부의 규제가 민간 주도 시장의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기업 창업과 공장 입지, 자금조달이나 시장진입 등의 행정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 등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을 대폭 개방했다.
특히 김영삼 정부가 OECD 가입을 위해 금리자유화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자 야당은 외화출자와 개도국 지원 등의 의무사항이 지나치게 많아진다며 시기상조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김 전 대통령은 정부 차원에서 OECD 가입을 역점 사업으로 지정하면서 결국 가입을 성사시키며 선진국 대열 합류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다만 1997년 금융·외환시장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결국 같은 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구제금융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이에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자본시장을 성급하게 개방해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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