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주연·이재용 감독 연출…세번째 만남
몬트리올판타지아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쾌거
"나랑 연애하고 갈래요? 잘 해 드릴게."
종로 일대에서 노인을 상대로 '성(性)'을 팔아가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65세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은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로 통한다. 소영은 성병 치료 차 들른 병원에서 코피노(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자녀) 소년 민호(최현준)를 만난다. 한국인 의사 아빠를 찾아 필리핀 엄마와 한국에 온 민호는 엄마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자 갈 곳 없는 처지가 된다.
소영은 무엇에 이끌리듯 민호를 집으로 데려온다. 트랜스젠더인 집주인 티나(안아주), 한쪽 다리가 없는 장애인 도훈(윤계상)과 이웃 사이인 소영은 민호를 품어주며 먹이고, 재우며 나름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소영은 단골소님 중 한 명인 송 노인으로부터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을 받는다. 송 노인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사는 게 창피해. 제발 날 좀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송 노인의 부탁을 받은 소영은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다 그를 진짜 '죽여주게' 된다. 이후 소영에게 힘들어 죽고 싶은 노인들의 부탁이 이어지고, 소영은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죽여주는 여자'는 가난한 노인들을 상대하며 먹고 사는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 소영이 사는 게 힘들고 죽고 싶은 고객들을 진짜 '죽여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노인의 성매매를 통해 삶의 종착지인 죽음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영화에는 죽고 싶어 하는 노인 세 명이 나온다. 중풍으로 고통받는 노인, 치매에 걸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노인, 사랑했던 사랑의 부재로 인해 외로워하는 노인 등이 그렇다. 이들은 저마다의 상처에 몸부림치다 소영에게 부탁한다. '죽여달라'고.
누구나 태어나서 늙고, 죽기 마련이라 세 노인이 보여준 고통과 고독은 남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노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늙음'과 '죽음'은 먼 일로만 느껴지고, 특히 먹고 살기 바쁜 젊은이들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내 앞에 닥친 일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 자살률 1위인 한국엔 복지 제도도 부족하고, 노인을 위한 탄탄한 일자리도 거의 없다. 영화는 이 부분을 건드리며 노년의 쓸쓸함을 짚어준다.
젊었을 때 멀쩡한 신사였던 노인도 병들어 무너지고, 곁에 아무도 없는 장면이 아프게 다가온다. 송 노인이 뱉은 "사는 게 창피해"라는 대사도 가슴 속을 파고든다.
영화는 우리네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늙어가는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있나', '내 젊음만 생각하느라 타인의 늙음에 대해 소홀히 생각한 건 아닌가', '외롭다는 할머니의 말을 왜 가볍게만 여겼을까'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내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외롭게 혼자 죽으면 어쩌나', '내 곁에 누가 있을까',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게 있는 걸까'라는 씁쓸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인생의 허무함을 들춰낸 이 영화는 결국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미덕은 또 있다. 남들이 '몸 파는 년'이라고 욕하는 소영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트랜스젠더, 장애인, 코피노)을 조명한다는 점이다. 마음 따뜻하고 착한 소영은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소외된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소영에게 '창녀'라고 욕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본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함부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뉴스만 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범인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소영이 뱉은 대사는 적잖은 울림을 준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속사정은 남들이 모르는 거거든."
50년 연기 경력을 자랑하는 윤여정은 소영을 어루만지며 연기했다. 매번 다른 역할을 소화하는 윤여정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죽여주는 여자'는 아픔이 있는 소영에게 오롯이 공감한 윤여정의 연기력으로 완성됐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정리를 하고 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가) 극한 직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울하고 힘들었다. 모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있는데 (감독님이) 그런 세상까지 알게 해 줬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다세포 소녀'(2006), '여배우들'(2006),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2013) 등을 만든 이재용 감독이 연출했다. 각본을 쓰기도 한 이 감독은 따뜻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중간중간 위트도 툭툭 던지면서 매끈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감독은 "내가 감히 다룰 주제인가 고민했다"며 "나이가 들어가며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인물들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시기가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며 "지금이라도 노인 문제가 좀 더 수면에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죽여주는 여자'는 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제 6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만 부문, 제40회 홍콩 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칭됐고, 제20회 몬트리올 판타지아영화제 아시아 섹션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0월 6일 개봉. 111분.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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