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거인들의 시대’를 대망한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6.10.02 07:55  수정 2016.10.02 08:05

<호호당의 세상읽기>국운의 바닥인 2024년 지나 2040년대가 되면...

우리 돈인 원화는 1962년부터 사용되었다. 그 사이에 돈의 가치가 과연 얼마나 떨어졌을까 늘 궁금해 한다.

생각해보면 영화 관람료는 1960년대 무렵 12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평균 8천원 정도한다. 666 배 오른 셈이다. 하지만 60년 당시 실정으론 영화 본다는 것이 명절 때나 가능한 대단한 사치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63년 당시 나는 등교할 땐 버스를 탔는데 학생은 2원이고 성인은 3원이었던 기억이 난다. 1970년 초반엔 12원했던 기억도 난다. 물론 당시에 버스 요금이 그렇게 저렴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감안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1,250원, 따라서 400배 이상 오른 셈이다.

쌀 가격은 어땠을까? 검색해보니 1970년 당시 40 킬로그램 쌀이 2,880원이었다 한다. 쌀이 흔해진 지금 8만8천원 선. 당시엔 쌀이 절대 부족해서 일반 가정에선 보리 혼식이나 정부가 해외에서 조달해준 수입 밀가루를 많이 먹었다.

라면의 경우는 인플레이션 지표로서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1963년 처음 삼양라면이 나왔을 때 10원이었는데 당시로선 꽤나 비싼 가격이라 지금처럼 손쉽게 사먹을 수 있는 식품이 아니었다. 라면이 저렴해지면서 대중화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학교 교사의 경우 1960년대 초반 4천원이 조금 넘었다는 기억도 난다. 1963년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자신의 봉급에 대해 말씀해주신 기억이 있다.

1960년대 궁핍하던 시절과 지금이 근본적으로 다른 까닭에 돈 가치를 정확하게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196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우리 돈 원화의 실질 구매력은 지금에 이르러 최소한 500-800배 정도는 떨어졌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서 그간의 인플레이션이 50년 사이에 500-800배 정도 진행되었다는 말이다.

반대로 땅값 상승은 실로 엄청났다.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1965년 당시 말죽거리(오늘날 양재역 4거리 인근) 일대의 땅값은 평당 50원이었다고 한다.

현재 가정법원이 들어온 뒤 길거리 쪽은 평당 1억이고 안쪽은 최소 5천만원이다. 그 사이에 적어도 1백만 배가 오른 셈인데, 인플레이션을 800배라 감안해도 실질 상승률이 1,250배는 된다 하겠다.

또 놀라운 것은 1970년대 초반의 일로 기억하는데, 은행 정기예금의 금리가 한 때 연 36%이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인플레이션이 엄청 났음을 말해준다.

당시 기업들의 자금수요가 워낙 컸던 탓에 은행권에서 돈을 대출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심지어는 사채돈을 빌려 시설투자를 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당시 사채 이자는 무려 월 5부 즉 5%가 기본이었다. 더러 월 1할 즉 10%에 달하는 고금리 사채도 있었으니 이를 ‘달러 이자’라고 불렀다.

이에 1972년 경기가 급격하게 나빠진 상황에서 기업들의 금리부담이 너무 커져서 모조리 도산할 지경에 이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그 해 8월 3일자로 깜짝 놀랄 긴급명령을 발동했으니 8/3 사채동결조치였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놀랍다.

사채권자와 맺은 모든 채권 채무 관계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선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신고가 된 사채는 3년간 동결되며 그 이후 5년에 걸쳐 분할 상환을 하되 금리는 월 1.35%로 대폭 경감한다는 내용이었다. 평균 4-5% 하던 월 이자가 그렇게 되었으니 당시 사채업자들은 깡그리 망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개발도상국에서나 볼 수 있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당시 우리 경제는 취약했다.

1960년대 당시 달러 환율을 보면 그 사이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해왔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1달러는 250 원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명동 암 달러 시장에선 280원 정도였다. (당시는 달러가 정말 피와도 같이 소중한 외환이었기에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그 바람에 블랙마켓이 존재했다.)

얼핏 생각하면 달러가 쌌다고도 생각이 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 사이에 원화 가치는 500-800배 정도 하락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250원은 지금 돈 가치로 125,000-200,000원 정도 된다. 달리 말하면 당시 1 달러는 그 정도로 높았다는 말이 된다.

실감나게 말해보자면 1달러에 250원이던 당시 버스 요금이 3원이었으니 1달러면 버스를 무려 80 번 이상 탈 수 있는 돈이었던 셈이고, 영화 관람료가 12원이었으니 1달러면 12번을 볼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접대부들, 소위 양공주 또는 양갈보들이 꽤나 많았는데 花代(화대)로서 1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양공주들은 당시로선 상당히 고급매춘부였는데, 이 가격이 그 이후 우리나라 룸살롱에서 흔히 말하는 ‘2차’ 나가면 받는 화대의 표준가격이 되었다는 점도 알려드린다.

그렇기에 당시의 미국 달러는 지극히 비싼 미국의 돈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미국 달러가 지금은 1100원 정도가 되었다. 달러 가치가 그 사이에 엄청 하락한 셈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우리 경제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수출이 19개월 연속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월 1일 부산항 신선대부두 야적장에 수출입화물이 있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연합뉴스

우리나라가 1965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때 핵심안건은 이른바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보상, 즉 대일청구권 문제였다. 우리 측은 8억 달러를 요구했고 일본은 7000만 달러가 최대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에 미국이 뒤에서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은 결과 7억5000만 달러를 받아낼 수 있었다. 야, 짜슥아, 주라니까! 했던 미국이다.

당시의 7억5000만 달러는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당시 1달러는 250원이었으니 7억5000만 달러는 당시 원화로 1875억원이 된다. 이에 우리 원화의 가치가 그 사이에 500배 정도 하락했다고 보면 대략 지금 우리 돈 가치로 94조원 정도가 되는 셈이고 이를 다시 지금의 달러로 환산하면 850억 달러가 된다.

(참고로 얘기하면 7억5000만 달러를 우리가 대일청구권으로 받아낼 당시 일본 정부의 한 해 예산규모는 15억 달러 정도였다는 사실, 국가예산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대단한 거액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실 더 엄청났던 것이 바로 베트남전 파병을 통한 외화벌이였다. 60년대에서 70년 초반까지 평균 4만(피크 시에 5만) 정도의 우리 군대가 참전했었다. 미국과 국제연합이 한국전쟁 당시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란 명분으로 참전하긴 했지만 그 본질은 용병 비즈니스였다.

참전을 통해 우리 정부가 벌어들인 달러가 10년간에 걸쳐 10억 달러 정도였고, 민간기업인들도 상당한 재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의 경우 베트남에서의 물류 운송 특수를 통해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에서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에 더하여 베트남전 참전을 통한 외화벌이야말로 당시 만성적 외화부족으로 인한 경제 난국에 숨통을 트고 나아가서 우리가 수출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근본 바탕이 되어주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 말까지 줄곧 우리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기에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국제적으론 지극히 저렴한 노동력이었다. 정말로 헐값이었다.

이런 말을 하니 서독 광부와 간호사(사실은 간호보조원)들이 절로 생각이 난다.

서독의 입장에서 당시 광부와 간호보조원은 전형적인 기피 직종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광부와 간호사를 모집했을 때 경쟁률은 무려 100 대 1이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이유가 뭘까?

서독에 갈 경우 받게 되는 월 보수가 당시 우리나라에 비해 무려 30~40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 일하면 국내에서 3년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 독자의 한 달 급여가 300만원이라 하자. 그리고 해외 근무를 할 경우 한 달에 9천에서 1억 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 엄청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 바람에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으며 당시 서독에 가셨던 분들은 우리로선 대단한 1류 엘리트들이고 인재들이었다. 대단하셨던 분들이기에 그 이후 독일에서 정착한 뒤에도 거의 모두가 크게 성공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외화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족한 외화 즉 달러는 대부분 미국 정부로부터의 차관을 통해 간신히 메워나갔다. 그런데 1970년대 말 오일 쇼크가 터졌다.

원유 가격 급등으로 1975년 무렵엔 무역수지 적자가 당시로선 천문학적 숫자인 20억 달러에 달했다. 실로 국가부도 일보직전의 상황이었다.

이 때 또 다시 우리를 구해준 아이템이 바로 중동 건설 시장 진출이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을 위시하여 우리 건설사들이 대거 중동 플랜트와 인프라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를 통해 당시로선 실로 엄청난 외화벌이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곤란한 처지의 우리를 위한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 하지만 우리가 과감하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지독하게 근면한 반면 지극히 저렴한 우리의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1970년대 내내 우리나라는 정말이지 해마다 고비였고 위기였다. 부족한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여름 10%의 부가가치세를 신설했다. 이는 당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지만 사실 불가피했던 것이다.

독재자 강권의 통치자 박정희 대통령의 인기 내지는 지지가 급격하게 떨어진 배경에는 바로 이 부가가치세 신설이 결정적이었다.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가속화된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강철의 독재자 박정희는 눈꺼풀 한 번 까닥하지 않고 수출 중화학 공업 육성에만 매진했다. 은행의 모든 대출가능 재원을 깡그리 긁어다가 재벌들 손에 쥐어주고는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라고 종용했던 것이다.

당시 나름 경제 좀 안다고 하던 경제학자나 언론인들은 수출산업 육성에 나라의 미래를 건다는 점에 대해 거의 대부분 부정적이었을 정도로 위험한 국가적 모험, ‘올인’이었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재벌들을 불러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 하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1979년 10월의 어느 날 박정희는 부하의 손에 의해 피를 흘리고 죽었다.

하지만 국가의 명운을 건 박정희의 일대 도박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76년을 전후해서 투자했던 수출 중화학 공업이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1986년이 되자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다. 내가 말하는 10년 인과의 법칙에 해당된다.

이른바 ‘황금의 3저 경기’는 1988년까지 3년에 걸쳐 이어졌고 그로서 우리 대한민국은 도약의 확고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간의 외채를 한 방에 모조리 갚을 수 있었고 그 이후 우리 경제는 늘 무역흑자를 유지해왔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벤처 기업이었던 우리 대한민국이 글로벌 무대에서 화려하게 등장했던 것이다.

나 호호당은 1955년에 태어났기에 그간의 일들을 기억으로 눈치로 또 나중에 자료를 통해 대충은 알고 있다. 오늘은 지난 50년간 우리의 변천사를 얘기해보았다. 지난 세월이 개인적으로도 또 국가 전체적으로도 마치 주마등처럼 일순에 스쳐가고 있다.

1960~1980년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을 오늘에 와서 돌이켜보니 참으로 위대했다는 생각이다.

이제 세월이 묵었고 낡았다. 기가 꺾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떨어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세월 사이에 환경이 이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여긴다.

이제 곧 맞이할 국운의 바닥인 2024년을 지나고 그 사이에 고통을 받고 단련되는 과정 속에서 2040년대가 되면 또 다시 힘차게 일어설 우리인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다시 한 번 ‘거인의 시대’가 올 것이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www.hoho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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