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트럼피즘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당선 확률 9% 깨고 선거인단 과반 확보
양극화 심화·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만 등 '승리 요인'
이번에도 ‘8년 주기설’이 통했다.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 행(行) 열쇠를 쥐게 됐다. 군이나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완전한 ‘아웃사이더’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이변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변화에 대한 절실한 ‘욕망’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는 9일(현지시각) 선거인단 538명 중 ‘매직 넘버’로 불리는 과반 270명 이상을 확보했다. 12월 19일 선거인단의 투표 절차는 남아있지만, 확보된 선거인단이 타 후보에게 투표하는 일은 없다는 점에서 트럼프가 사실상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된 셈이다. 이와 함께 상·하원도 모두 공화당이 장악했다.
트럼프는 4년 전 대선 때 밋 롬니 공화당 후보가 이겼던 노스캐롤라이나와 애리조나뿐 아니라 당시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의 손을 들었고, 최대 경합주로 꼽힌 플로리다·오하이오·아이오와주에서도 선거인단을 독식했다.
트럼프의 승리는 미 언론은 물론 국내에서도 대체로 예견하지 못한 ‘이변’이다. 162년 역사의 공화당 역사상 공직 경험이 전무한 첫 아웃사이더 후보인데다, 온갖 추문에 시달리며 미국 현지 민심을 잡지 못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미국 CNN은 이날 트럼프의 당선 확률을 9%로 예측했다. 반면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확률은 91%였다.
트럼프가 대선전을 한 데는 ‘트럼피즘(Trumpism)’으로 집약된 유권자들의 변화와 개혁 열망이 표에 대거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트럼피즘’은 트럼프 식 언행과 생각하는 방식에 열광하는 현상으로, 양극화와 삶의 질 저하, 소수의 정치 기득권층이 장기 집권하는 동안 쌓인 국민의 피로와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럼피즘’의 특징으로는 △국수주의적 대외정책 △보호무역주의 △권위적인 통치체제 복원 △자국 우선주의가 꼽힌다.
특히 이에 대한 불만이 상당한 저학력 백인, ‘러스트벨트’(쇠락한 중서부 공업지대) 유권자들이 트럼프에 열광하며 ‘트럼피즘’을 확산시켰다.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는 힐러리의 당선을 막기 위해 트럼프 편에 선 이들도 상당수였다. 양당 체제인 미국에서 한 정당이 대선에서 세 번 연속 승리하기 어렵다는 ‘8년 주기설’도 이 같은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
박상철 경기대 교수는 9일 본보와 통화에서 “미국은 변화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곳”이라며 “8년 주기설은 물론, 트럼프의 여러 가지 선거 전략이 미국의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을 대변하고 자국 우선주의 등 자국민의 열망을 담아내 당선 가능성에 힘을 실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도 본보에 “트럼프는 워싱턴 주류 정치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판을 바꾸고 싶다는 욕구를 끌어냈다”며 “트럼프는 논란이 될 발언들을 많이 했지만, 자국민의 가려운 부분을 긁었다”고 풀이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도 통화에서 “미국이 극단적인 양극화로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여기에서 파생되는 정책결정 과정 중 비(非)기득권 세력의 소외감이 트럼프 당선의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승리 요인에는 여론조사는 물론 외부에 트럼프 지지 의사를 드러내지 않는 ‘샤이 트럼프’도 거론된다. 트럼프가 인종·종교·여성 차별적 발언과 음담패설 등으로 끊임없는 논란을 빚어 왔다는 점에서 실제 그를 지지하더라도 꺼려하는 척하거나 숨겨온 유권자가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이 때문에 트럼프 측은 여론조사가 그의 지지층의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결국 그가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또한 선거 막판을 강타한 미 연방수사국(FBI)의 ‘이메일 스캔들’ 재수사가 힐러리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무혐의로 수사가 종결됐지만, ‘정치인’ 힐러리의 이미지와 신뢰도에 상처를 입혔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교수는 “힐러리의 이메일 추문으로 ‘기존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트럼프는 취임 후 ‘경제 회복’과 ‘국가안보’에 국정 운영 방점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한 자리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착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를 ‘취임 100일 계획’으로 밝혔다.
또한 석탄 연료 생산 증가 및 키스톤XL 송유관 사업 재개, 유엔 기후변화 프로젝트에 투입된 수십억 달러 예산 삭감을 할 방침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경제 구상이 현실화 될 경우 10년 이내에 최소 2500만 개 일자리 창출과 매년 4%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장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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