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터뷰] 유인영 "잃었던 자존감, '내려놓기'로 회복"
학교 재단 이사장 딸 혜영 역 맡아
"서른 즈음에 슬럼프 겪고 편해져"
학교 재단 이사장 딸 혜영 역 맡아
"서른 즈음에 슬럼프 겪고 편해져"
큰 키에 조막만한 얼굴을 자랑하는 배우 유인영(32)은 도회적인 이미지다. 다가가기도, 말 걸기도 어려울 것만 같은 새침한 여자 같다.
그의 이미지는 그간 출연한 작품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그녀를 모르면 간첩'(2004)으로 데뷔한 그는 '미우나 고우나'(2007), '눈의 여왕'(2006), '아버지와 마리와 나'(2008),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2010), '기황후'(2013), '삼총사'(2014), '가면'(2015), '오 마이 비너스'(2015), '굿바이 미스터 블랙'(2016) 등 30여편에 출연했다.
주인공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역할을 도맡아 해온 유인영은 주로 도도한 캐릭터를 맡아왔다. 대중이 생각하는 이미지도 그렇다. 이번에는 부잣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여교사 역을 맡아 스크린에 나온다.
영화 '여교사'(감독 김태용)는 계약직 여교사 효주(김하늘)와 정교사 혜영(유인영), 그리고 남학생 재하(이원근)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최근 서울 소격동 카페에서 만난 유인영에게 영화의 파격적인 결말에 대해 물었다. 언론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봤다는 배우는 엔딩 10분 분량을 못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장면을 찍을 때 의견이 분분했다"고 했다.
학교 재단 이사장 딸인 혜영은 부족한 것 없이 자라 언제나 밝고 싱그럽다. 혜영은 아빠 '빽'으로 단숨에 정규직 교사가 되고 제자 재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교사와 남제자의 파격 설정을 내세운 이 영화는 인간의 질투와 욕망, 잔인함의 끝을 보여준다.
혜영은 악의를 갖고 일을 저지르진 않기 때문에 악역이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유인영은 "혜영이 입장이 돼서 연기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악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행동은 그렇지 않은데 못되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극 중 효주와 혜영은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를 통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보여준다. 혜영의 감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은 건 아쉬운 대목이다.
"드라마 속 악역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던 터라 영화에서도 이 부분이 고민이었죠. 효주를 대할 때 세게 표현해야 하는지 감독님께 여쭤봤지요. 감독님은 자연스럽게 표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왜 그간 '극과 극으로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재하와 혜영의 관계를 보여주는 회상신도 있었는데 편집됐어요. 처음엔 아쉬웠는데 오히려 불친절한 영화가 더 재밌었습니다."
악의 없는 혜영이는 극 후반부에 효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뱉는다. 해맑게 웃으며 상대방을 비꼬는 장면에서 정말 악의가 없었는지 궁금했다. "혜영이는 일을 시키는 게 일상인 아이예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궁금한 부분을 물어본 거죠. 맑고, 순수하고 단순한 아이라서 그래요. 호호."
배우는 효주, 혜영, 재하 모두를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해석했다. 혜영은 누군가를 괴롭히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다양한 느낌을 주는 새로운 캐릭터라는 게 유인영의 설명이다.
극 후반부 효주와 혜영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장면에서부터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운동장 장면을 찍을 때 그랬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효주의 감정이 극에 닿을 수 있게 혜영이가 효주의 무언가를 긁어줘야 했어요. 혜영의 감정이 갑자기 변한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앞서 이원근은 인터뷰에서 교사 혜영을 향한 사랑이 모성애와 비슷하다고 했다. 혜영이 제자 재하에게 느끼는 사랑은 어떤 감정일까. 유인영은 "어머, 모성애라고 했어요? 난 아닌 것 같은데..."라고 웃었다. 이어 "당시엔 사랑이라고 생각한 듯하다"며 "어렸을 때 할 수 있는 풋풋하고 애틋한 사랑"이라고 했다.
중간에 나오는 반전에 대한 의도를 묻자 유인영은 어려운 질문이라며 옆자리에서 인터뷰 중이던 김태용 감독을 '소환'했다. 김 감독은 "혜영이는 어린아이 같은 인물"이라며 "재하를 장난감으로 생각하며 효주에게 해코지한 것"이라고 했다.
민감한 소재 탓에 '문제작'이라는 얘기를 듣지만 어쨌든 '여교사'는 김하늘, 유인영 등 여자 배우들이 주축이 된 여성 영화다. 남자 배우들이 장악한 충무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유인영이 작품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반가웠어요. '여교사'가 잘 돼야 더 많은 여성 영화가 나오는데 이 영화 하나로 바뀔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배역은 많은데 역할이 한정적이에요. 최근 나온 '미씽: 사라진 여자'나 '여교사' 같은 영화가 단비가 되는 상황이 됐어요."
김 감독은 유인영의 전작을 안 보고 유인영을 캐스팅했단다. 미팅 때도 영화 얘기하지 않고 수다 떨다가 캐스팅 얘기를 꺼냈다고. 유인영은 "새로운 역할을 주신 감독님께 감사하다"고 웃었다.
평소 밝은 모습을 캐릭터에 반영했다는 배우는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고 낯도 가리지만 친한 사람들 앞에서 나오는 모습을 역할에 녹여 냈다"고 했다.
그래도 유인영 특유의 도회적인 이미지는 이번에도 보였다.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이는 배우는 진중한 답변을 내놨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오 마이 비너스'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제 나름대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답니다. 제가 못해서 계속 '도회적인 이미지'로 굳히는 듯한데 속상해요. '언니, 착한 역할 해주세요'라고 응원하는 팬들 덕에 위안을 받지요."
배우는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고 했다. '도회적인 이미지'가 오래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렇단다. 젊고 예쁜 배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도회적인 이미지 하나로 밀고 나가기엔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큰맘 먹고 출연한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선 유인영의 색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영화 홍보 때문에 나갔는데 예능은 정말 어렵다"며 "제작진이 편집을 잘해주셨다"고 수줍게 말했다.
지난해 천만 영화 '베테랑'에서 특별 출연한 그는 "훌륭한 선배들, 제작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며 "나를 벗어나 주위를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했다.
유인영은 주로 드라마에 출연해왔다. 이유를 묻자 "영화에선 신선한 얼굴을 많이 찾는데 나는 경력도 있고, 드라마에서 계속 소비돼왔다"면서 "'진짜 연기 잘한다'는 얘기도 없어 참 모호한 위치에 있었다. 예전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고민이 깊어 보이는 배우에게 터닝포인트가 있었을 법하다. 서른 즈음, '별에서 온 그대'와 '기황후'를 연달아 찍을 때였다. 캐릭터 한계에 부딪히면서 자존감도 떨어졌다. 항상 두 번째 역할만 한다는 사실에 올라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스스로를 내려놓았다.
"두 작품에 잠깐 출연했는데 예전의 저였으면 안 했을 거예요. 특히 사극에 대한 공포도 있었고요. 당시 정말 예민했어요.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는데 작은 비중에도 저한테 필요한 역할이었죠. 비중에 상관 없이 다양한 역할을 거치면서 힘든 시기를 극복했습니다."
10년 전으로 돌아가면 다시 배우의 길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이 날아왔다. 그는 "10년 넘게 이 일을 한다는 건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며 "다시 돌아간다 해도 배우의 길을 택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인터뷰도 꺼리고 답변도 꾸며서 내놨는데 지금은 나아졌다"며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다"고 했다.
유인영은 '가면', '오 마이 비너스', '굿바이 미스터 블랙', '여교사'를 연달아 선보이며 지난 1년을 바쁘게 보냈다. 차기작 계획에 대해선 "검토하는 작품이 있긴 한데 조금 더 기다릴 생각"이라며 "이전보다 열린 캐릭터를 맡았으면 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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