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옥죄던 5%룰 완화...주주제안 강화 전망
삼성전자 등 전자투표제 도입 확산...개미 눈치까지
오는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기관투자가 및 개인투자자의 주주권 강화 움직임이 더욱 커질 전망이어서 상장사에 비상이 걸리고 있다. ‘5% 룰(기관투자가의 대량보유 공시의무)’이 완화돼 목소리를 내려는 기관투자자들이 늘어난 데다 이달 들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의 전자투표제 도입이 잇따르면서 소액주주 참여도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다.
국민연금 상장사 56곳에 주주권 행사 칼 빼들어
1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 7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대한항공 등 주요 상장사 56곳의 주식 보유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일반 투자’로 변경했다. 이들 기업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이 배당 확대를 요구하거나 위법 행위를 한 이사에 대한 해임을 청구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5% 룰은 상장사의 주식 등을 5% 이상 보유하게 되거나 보유 지분율에 1% 이상 변동이 생기면 이를 5일 이내에 공시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앞서 금융위원회는 5%룰의 보유 목적을 세분화해 기존 경영 참여, 단순 투자 2가지로 분류돼 있던 보유 목적을 경영 참여, 일반 투자, 단순 투자 3가지로 늘렸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잦은 공시를 하면 투자전략이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경영 참여’ 목적의 주식 보유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지난달 1일부터 시행된 개정 자본시장법 시행령에 따르면 회사 및 임원의 위법 행위에 대응하는 해임 청구, 보편적 지배구조 개선과 배당 관련 주주 활동은 ‘경영권 영향 목적’ 활동에서 제외됐다. 이러한 활동을 ‘단순 투자 목적’이 아니라 이번에 신설된 ‘일반 투자 목적’으로 분류하면서 월별 약식 보고만으로 가능하게 한 것이다. 국민연금 등 기관의 공시 부담이 줄면서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 원칙)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박소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민연금이 제도 완화를 바탕으로 스튜어드십코드를 강화할 수 있게 되면서 특히 배당성향 확대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지분 보유목적을 일반투자로 바꾼 종목을 살펴보면 전부 코스피200에 포함되는 시가총액 상위 기업으로, 직접적 경영참여는 자제하고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취지에 맞게 주주권 행사를 확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5일에는 KB자산운용과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 일부 종목에 대해 보유 목적을 일반투자로 바꾸는 공시를 했다. KB자산운용이 일반투자로 분류한 기업은 효성티앤씨, 광주신세계, 골프존, KMH, 컴투스, SM이다. KB자산운용은 지난해 SM에 이수만 회장의 개인 회사 라이크기획과의 합병과 배당 등을 요구하는 주주서한을 발송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은 세방, KISCO홀딩스, 넥센에 대해 일반투자로 보유 목적 변경 공시를 했다. 이에 따라 세방에 배당성향 제고와 자사주 매입·소각을 요구하는 주주 서한을 보냈고 넥센에게는 시장 친화적인 주주환원정책에 관한 긍정적인 검토를 촉구했다. KISCO홀딩스에는 배당성향 및 배당금 제고, 자사주 소각 등을 요구했다.
앞서 정부는 경영계의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5%룰 완화 추진을 강행했다. 다만 재계는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가 기업에 과도한 경영간섭을 할 수 있고, 헤지펀드들의 경영 공격 등이 우려된다며 반발을 이어가고 있어 부작용을 둘러싼 논란 역시 이어질 전망이다.
삼성전자·현대차 등 대기업 주총 전자투표 도입
주요 대기업들의 전자투표제 도입도 확산되고 있다. 제도 시행 10년 만에 주주들의 편익 제고 차원에서 도입을 검토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여기에 최근 불거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전자투표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국예탁결제원은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주총 운영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올해 전자투표 수수료를 면제하기로 했다.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로 2010년 5월부터 시행됐다. 이후에도 상장사들은 전자투표 도입에 소극적이었지만 2017년 말 섀도우보팅 제도 폐지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전환됐다. 기업들이 주총 의결이 가능한 최소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자투표제를 도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주주행동주의가 부상한 것도 시장의 관심도를 높였다.
삼성전자는 최근 60만명이 넘는 소액주주들을 위해 온라인을 통해 간단히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전자투표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전자투표제 시행을 전 상장계열사로 확대한다. 기존 현대글로비스 등 3개사에서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등 9개사로 늘리기로 했다.
2017년 SK그룹이 국내 대기업 지주사들 중 처음으로 전자투표제를 실시했고 전 계열사로의 확대 적용을 진행하고 있다. 롯데하이마트가 전자투표제를 시행 중인 롯데그룹 역시 전자투표제 확대 도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LG를 제외한 국내 주요 그룹이 전부 전자투표를 도입하게 된 셈이다.
앞서 업계에서는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한진그룹 주총에서 전자투표제가 도입될 지에도 관심을 보냈다.
남매 간 경영권 분쟁 중인 한진은 조원태 회장 측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연합 측의 지분 차이가 1%포인트 안팎으로 추정되는 상황이다. 소액주주의 결정이 주총 결과를 가를 수 있는 만큼, 전자투표 채택이 최대 변수로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진그룹 측은 “전자투표제가 없어도 주총 참석률이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시행 계획이 없다고 밝힌 상태다.
국내 전자투표제 도입의 활성화를 위해선 일본의 사례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동경증권거래소 1부상장회사 중 시총 100억엔 이상 회사의 전자투표 가입률은 50% 미만이지만 시가총액 1조엔 이상 회사의 전자투표 가입률은 94.6%에 달한다. 시가총액이 높은 대형 기업일수록 전자투표를 더 많이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에서 주주들이 주총에 무관심한 이유 중 하나는 현재 주총 결과 공시가 불성실한데도 원인이 있음을 고려해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일본과 같이 주주총회 결의사항에 대한 공시 수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혜진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의 경우 주주총회 결과에 대해 의안별로 총 투표수, 찬성, 반대, 기권 비율까지 매우 상세하게 공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면서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확산으로 주주들의 책임감 있는 의결권 행사가 중요해지는 만큼 주주들에게 일본과 같이 주주총회 결과에 대한 공시 요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