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징벌로는 너무 잔인했다
야당, 사면론에 제대로 대응해야
‘이명박·박근혜 사면 건의’ 카드를 꺼내 들었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문재인 정권 강성지지자들의 맹공을 받고 있다. “국민을 배신하는 대통령은 탄핵 되듯이 당을 대변하지 못하는 당대표는 필요 없다.” “당신 말고도 민주당에서 대통령할 분들 많으니 걱정 말고 물러나시오.” 민주당 당원게시판에 올라온 비난이다. 당 소속 의원들 가운데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훨씬 커 보인다. 청와대는 아직 ‘건의’가 없으니 논평 할 것도 없다는 입장이라고 전해진다.
물론 이건 이 대표의 정략적 카드다. 차기 대권 주자들에 대한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그는 지난해 8월부터 이재명 경기도 지사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윤석열 검찰총장과 3강구도를 형성하면서 최하위에 랭크되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고착되면 그에겐 희망이 없다. 그래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로 ‘사면’카드를 꺼내 들었는데 역풍이 예사롭지 않다.
정치적 징벌로는 너무 잔인했다
여권 내에서 반발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야권에서까지 거부감을 드러내는 난해한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으니 별 일이다. 야권, 특히 국민의힘으로서는 자신들이 사면을 요구하지도 못하고 있는 처지에서 오히려 여당 대표가 치고 나오는 상황이 되어 아주 난처해졌을 법하다. 더욱이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지난달 15일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한 다음이다. 그래서 곤혹스런 표정과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이는데,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표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형량은 아주 모질었고 구속기간 또한 너무 길었다. 전직 대통령들이 재임 중에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사실상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인 형을 선고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2017년 3월 31일 구속된 이후 지금까지 3년 9개월여가 지났다. 이렇게까지 악착스러워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 전직 대통령이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 중형에 처해졌다는 것은 형식논리다. 사실은 정치적 징벌 혹은 보복이 성격이 더 강하다. 민주당 이 대표가 사면론을 제기한 명분으로 ‘국민통합’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 사건의 정치성을 설명하기엔 부족하지 않다.
민주정치를 표방한 나라라면 정치적 숙청은 가장 금기시해야 할 방법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그렇게 시작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이 파면된 후에 권력을 쟁취한 ‘혁명정부’로서 극적인 장면들을 국민, 특히 촛불군중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단죄했다. 퇴로를 스스로 막아버린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의 분위기는 ‘반성이 우선’이라는 쪽으로 쏠린다고 한다.
“나가고 싶어? 그렇다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
아마 이런 구도를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건 과도한 요구다. 온 세상에 망신을 주고, 감당하기 어려운 중형을 선고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기간을 가둬 뒀으면서 이제 다시 반성하면 내보내 주겠다고? 아무리 두 전직 대통령이 죄인의 처지가 됐다 해도 이렇게 까지 몰아세우는 것은 정치인들끼리의 도리가 아니다.
야당, 사면론에 제대로 대응해야
사실 사면은 정권 측의 부담을 덜면서 야당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는 책략이 될 수 있다. 지금 국민의힘은 비박세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이 사면된 후 변화가 없을 수 없다. 다시 친박·비박간의 대립이 격화될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계라고 가만히 있으라는 법이 있겠는가.
게다가 내후년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고 보자면 구도는 더 복잡해진다. 지금 야권 차기 주자군은 지리멸렬 상태다. 대신 편의상 ‘야권 주자’로 분류되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홀로 우뚝하다. 그는 여권 유력주자들과의 여론조사 지지율 경쟁에서도 우위를 보이고 있다. 야당들로서는 흥행을 위해서든 본선 경쟁력을 위해서든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윤 총장은 박영수 특검의 수사팀장으로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이끈 장본인이다. 설령 그가 정치에 뜻을 둔다고 한들 야권이 한 마음으로 수용하리라고 기대하기는 무리다. 박 전 대통령이 사면된 상태에서라면 윤 총장에 대한 야권의 계산은 더 복잡해진다고 봐야 한다.
정권 측으로서는 이만한 호재가 달리 없다. 이런 게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상대진영을 분열과 혼란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선거 전략이 있겠는가. 따라서 여권 안에 사면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은 갈수록 공유의 폭을 넓혀갈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야권, 특히 국민의힘으로서는 비상한 각오와 대응이 필요하다. 정치적 징벌인 만큼 사면의 논리와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고 집권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감당 못할 일이 있을 수 없다. 설령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과오가 크다고 하더라도 같이 정권을 담당했던 정당 아닌가. 함께 재기를 모색하는 것이 정치인들로서의 마땅한 의리일 것이다.
사면으로 인한 부담이 적지는 않겠지만 대응하기에 따라 오히려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머리는 쓰라고 있는 것이다. 사면론 카드는 어차피 선수를 빼앗겼다. 야권은 그걸 불가역적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사면 이후를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 제1과제는 대동단결이다. 그럴 역량이 없다면 석 달 후의 재보선이나 내년 대선에서의 승리는 기대않는 게 좋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