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의병으로서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사람들은 일본 군인들이 아닌 러시아 군인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포츠머스 회담 결과에 따르면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하얼빈을 비롯한 원래 청의 영토를 반환하고, 결정적으로 남만주철도(하얼빈에서 여순까지 이어지는 노선)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하얼빈에 있는 러시아 군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한 첫 번째 가능성으로 포츠머스 회담 이후 러일 간에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을 수 도 있다. 우리는 1909년 이전 러일 간에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밀약은 밀약일 뿐, 공식적인 조약을 대체할 수는 없다. 공공연하게 다른 국가의 주요 도시에 군대를 배치하는 등의 행위를 밀약 따위로 행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포츠머스 회담의 결과가 사실과 조금 다른 것일 가능성이다. 포츠머스 회담은 1904년 2월 일본이 기습적으로 시작한 러일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이루어진 러시아 대표와 일본 대표 간의 회담을 말한다. 이 회담은 러시아와 일본 간의 강화 조약으로 이어졌으며, 이 조약 체결과 비준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사전에서 포츠머스 항목을 찾아보면 대표적으로 다음의 사항을 합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첫째,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보호 감리 조치를 승인한다.
둘째, 러시아는 중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러시아의 관동주 조차지와 장춘-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셋째,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남쪽을 일본에 양도한다.
넷째,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등이다. 이것만 보면 일본의 분명한 승리다.
하지만 실제 조약은 15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각 조항을 살펴보면 1조는 이 조약을 통해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즉 조약의 목적이 종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조는 우리가 교과서 등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정치, 군사 및 경제적으로 우월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며, 한국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일본의 지도, 보호 및 감리 조치를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중략) 다만 러시아와 한국 국경 사이에 러시아와 한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떠한 군사적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다.
2조에는 ‘다만’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이것은 러시아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권리를 인정하는 대신 추가한 내용이었다. “러시아와 한국 국경 사이에 러시아와 한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떠한 군사적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 주둔 일본군 중 러시아와 인접한 함경북도의 경우 국경 경비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를 함경북도 청진 인근의 나남에 주둔시킬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개전 전까지는 러시아와 인접한 지역에 부대를 배치할 수 없었다.
중국 동북지역에 일본군이 주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훈춘 등 한국과 인접한 지역에 한인 사회를 건설하고, 독립운동 기지까지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봉오동 같은 경우는 그 건너편에 일본군 초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거주하며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3조는 랴오둥반도의 러시아 조차지 등을 일본에 양도하며, 이를 제외한 만주 전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철수하고, 중국 행정력을 복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별도의 세부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철수 기한은 18개월 이내이며, 양국의 전방 부대부터 철수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 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3조에서는 일명 ‘철도 수비대’라는 러시아군의 잔류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러시아가 일본에게 양도한 철도는 하얼빈부터가 아니라, 이미 일본군이 점령한 장춘 아래쪽의 남만주철도만 해당됐다. 장춘부터 하얼빈까지 이르는 철도 노선에는 여전히 러시아 철도 수비대가 잔류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얼빈에도 러시아 철도 수비대 즉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군이나 중국 경찰이 아닌 러시아군에게 붙잡혔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조차지 양도는 영토의 주권국인 청의 의사를 무시한 행위였다. 쉽게 이야기해서 세입자 간의 거래인 셈이다. 당연히 소유권자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상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1914년 일본군이 톈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하여 자국 조차지로 삼으려고 했을 때 이것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일본이 국제법을 무시한 채 무단 점령한 것으로 규정하고 반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이후 중국에 차관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러일 간의 조차지 양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이후 청 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취해야만 했다.
그리고 회담에서 주요 의제가 되었던 사할린섬의 양도 문제 역시 엄밀히 이야기하면 일본군의 점령지 철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7월에 이미 사할린섬을 완전히 점령하여 통제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전력상 이를 회복하기에는 요원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러시아는 일본에게 애써 점령한 사할린섬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당연히 일본은 배상금을 받고 점령지를 돌려주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포츠머스 조약을 살펴보면 일본이 승전국이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 영토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는 원천 금지되었고,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도 배상금 한 푼 못 받고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련과 여순 그리고 장춘까지의 철도는 이미 일본군이 점령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집주인이라 할 수 있는 청에게 다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양도와 관련된 거의 모든 조항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러시아가 양도한다 해도 청이 거부할 경우 일본은 청과 다시 협상을 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전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청일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청의 전력이 쇠약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중국 정부가 일본의 점령 행위에 대해 국제법을 문제삼아 다양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10조에 따르면 일본은 당시 자국이 양도받은 지역의 러시아 국적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권마저 보호할 의무까지 져야 했다. 당연히 청과 소유권 분쟁이 생기면 일본은 러시아인의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즉, 세입자가 바뀌었는데 전 세입자의 가족 한 명이 건물 한 채를 차지하고 계속 살겠다고 한다면 이를 보장해야하며, 이 때문에 대해 집주인과 그 남아 있는 세입자 가족 간에 분쟁이 생기면 이에 대해서도 해결해줘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강화조약 체결 당시 일본의 입장이 전혀 유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러일전쟁의 결과를 일본의 승리라고 이야기하지만, 최소한 포츠머스 조약만을 놓고 살펴보면 일본의 승리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러시아는 단 한 푼의 배상금도 내놓지 않았고, 빼앗긴 지역 마저 아무런 희생없이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패배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직 집주인과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요충지 랴오둥반도를 비롯해 전 세입자가 남겨 놓은 것이 있었고, 사할린 일부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일본이 전쟁으로 인해 치러야 했던 손실을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일본 국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전쟁을 계속하면 결국 패전국은 일본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은 막아야했다.
흔히 우리가 러시아의 주요 패전 원인으로 꼽는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혁명은 곧 진정된 반면, 일본은 전후 ‘히비야 방화 사건’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폭동이 일어나면서 계엄과 함께 정권까지 퇴진해야 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전쟁에 승리한 것과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 같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패배하지 않았지만, 승리한 것도 아니다. 그 양상을 일본의 승리로 단정하는 것은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그들이 남겨 놓은 프로파간다를 우리 역사에 반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