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중국 드라마 ‘겨우 서른’(三十而已, 2020)은 이제 막 서른 살을 맞이하는 여성 세 명의 일과 사랑을 그렸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한국 영화 ‘관능의 법칙’(감독 권칠인, 제작 명필름,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2014)은 그로부터 10년 뒤쯤의 상황, 인생의 황금기 40대를 보내는 세 여성의 일과 사랑을 좀 더 농염하게 그렸다.
‘겨우 서른’의 주인공들은 동갑내기이다. 상하이 명품매장 미실에서 일하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왕만니(장수잉 분. 매기 지앙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 한국에서는 강소영으로 불림), 모든 기준을 남편과 아이, 가정에 두고 ‘헬리콥터’ 부인이자 엄마로 삶을 매니지먼트 하는 구자(퉁야오 분), 대형빌딩 관리회사 사무직원으로 언제나 밝고 친절하고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남편만 보면 서운함이 켜켜이 쌓인 먹구름이 드리우는 중샤오친(마오샤오퉁 분)이 각기 다른 매력과 ‘인생 숙제’로 시청자의 눈을 붙든다.
‘관능의 법칙’에서는 두 명의 친구 신혜와 미연, 한 명의 언니 해영이 주인공이다.
정신혜(엄정화 분)는 방송국 예능 PD. 오랜 세월 남자친구 이성욱(최무성 분)을 위해 프로그램 기획서를 대신 쓰고 영상편집 밤샘마저 대신해 국장 자리에 오르게 도왔건만, 남자는 20대 신입과 결혼한다. 결초보은도 모자랄 판에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는데, ‘하룻밤 실수가 잉태로 이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는 성욱의 뻔뻔한 거짓말을 믿는다. 조카뻘 후배 황현승(이재윤 분)의 ‘직진’ 구애로 교제를 시작하는데, 어느새 그의 기획서를 자신이 쓰고 있다. 일머리는 똑똑하고 사랑에는 젬병. 일은 전국 최고로 잘하면서 ‘사랑은 하지만 비혼주의자’라는 량정센(마지위 분)의 거짓말을 믿는 만니를 연상시킨다. 세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미혼인 것도 같다.
조미연(문소리 분)은 구자처럼 모든 기준을 가정에 두는 인물로, 전업주부다, 아이는 유학 보냈고, 남편 이재호(이성민 분)와는 결혼할 때 약속한 ‘주 3회’를 관철하며 살고 있다. 인생에서 섹스가 중요한 만큼 하루의 반나절을 헬스클럽에서 보내 온몸에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잔근육이 발달한 미끈한 몸매의 소유자다. ‘완벽한 아내’ 구자의 기에 눌려 어깨가 움츠러든 남편 쉬환산(리쩡평 분)처럼 미연의 남편 재호도 ‘고개 숙인’ 남자다. 그런 남편의 기를 살려보겠다고 잠자리에 ‘메이드(하녀) 코스프레’까지 감행하는 열혈파다. 세 여성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패션 감각을 지닌 것도, 한눈판 남편을 좌시하지 않는 것도 구자와 같다.
이해영(조민수 분)은 흡사 샤오친처럼 통통 튀는 에너지에 애교 섞인 말투와 콧소리를 지녔다. 나이만 들었을 뿐 마음은 소녀에, 더 늦기 전에 ‘진한’ 연애도 하고 싶다. 하지만, 빵 구워 홀로 딸 수정(전혜진 분)을 키웠건만 서른이 다된 자식은 독립을 모르고 얹혀살려 한다. 딸 좀 내보내고 목하 열애 중인 최성재(이경영 분)와 한집살이 알콩달콩 해보는 게 소원인데, 남친이 ‘연애는 예스, 결혼은 노’란다. 일이 풀리려니 딸이 혼전임신으로 결혼을 서두르고, ‘결혼, 한 번 해본 걸로 충분하다’던 목수 남친도 맘을 바꾸는데…그만, 중병에 걸리고 만다. 인생 가장 깊은 계곡을 경험하지만 같은 남자와 두 번 사랑하는 것도, 화사한 일상복으로 화면을 빛내는 것도 샤오친과 같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시대 의식과 감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읽어 작품화하는 한국의 제작사 명필름(공동대표 심재명·이은)의 ‘관능의 법칙’을, 6년 뒤 중국에서 세 여성의 일과 사랑이라는 이야기 틀과 각각의 캐릭터 특성을 참고해 ‘겨우 서른’을 기획했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비슷하다. 결론을 지어놓고 바라본 결과일 테지만, 연상작용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유사성이 아니다. ‘관능의 법칙’ 그 자체다. 이제 막 서른이 된 이들의 이야기보다, TV 드라마보다 한층 화끈하다. 인생 좀 더 알게 된 언니들의 이야기, 30대와는 다른 40대의 고민과 감성이 108분의 영화 안에 진하게 녹아 있다.
출연 배우만 봐도 면면이 놀랍지만, 연기를 보면 더욱 놀란다. 우리가 익히 그 이름과 연기 스타일을 안다고 생각해온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권칠인 감독과 이수아 작가가 끌어냈다.
배우 문소리에게 섹시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은 이미 ‘바람난 가족’(2003) 때부터 각인됐지만, ‘관능의 법칙’을 보면 다시금 놀란다. 관능적이다. 연기파 배우가 하니 노출도 정사 장면도 남다르게 아름답다. 메이드 코스프레를 상대 배우 이성민에게 먼저 제안하는 대담함, “오히려 연기할 때는 부끄러운 게 더 재미있다”는 태도가 멋지다. 헬스클럽에서 반나절을 보낸다는 미연의 말을 온몸으로 확인시켜야 하는 배우의 고충을 제대로 감당, 19금 영화의 ‘비주얼 담당’을 확실히 한다.
배우 조민수는 인형 같은 미모로 필자의 기억창고에 저장돼 있다. 1987년 봄, 드봉 미네르바 화장품 모델로 등장했을 때 하얀 재킷에 챙 넓은 모자, 흰색 귀걸이가 인상적이었다. 여름엔 파랑 줄무늬 수영복을 입고 아이스쿨 제품을 광고했는데, ‘어른이 되면 꼭 사야지’ 하는 마음을 자극하는 CF였다. 연기도 잘하고 눈썹을 찡그리며 우는 연기가 참 예뻤던 배우를 한참 볼 수 없어 아쉽다가 영화 ‘피에타’(2012)로 만나 반가웠다.
먼저 영화로 만났을 때는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도 좋지만, 조민수가 연기상을 받는 걸 응원할 만큼 한층 깊어진 연기력에 감탄했다. 대면하여 만났을 때는 세월을 비껴간 외모에 놀랐다. 날씬한 몸매는 물론이고,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은 얼굴이라는 설명에 눈을 비볐다. ‘관능의 법칙’에서도 신혜, 미연과 친구라 해도 자연스러운 미모를 뽐낸다. 세 배우 중 가장 먼저 태어났는데, 귀여움은 조민수의 몫이다. 카섹스도, 성재와의 재회 후 다소 민감한 베드신도 조민수가 하니 ‘소녀 소녀 하다’.
배우 엄정화는 가장 섹시한 역을 맡았을 것 같지만 정반대다. PD라는 직업에 걸맞게 옷도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중성적으로 입고 말투 또한 그렇다. 승환과의 애정 행위에서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육감적 볼륨은 엄정화 그대로지만…싸구려 모텔에서 옴을 옮아 긁적대는 모습. 대본에도 저 장면에까지 있었을까 싶은 순간에도 계속 긁어대는 모습은 리얼 연기다. 타고난 몸매가 아니라 서핑 등으로 다진 건강미를 피력하고, 영화 ‘오케이 마담’에서 보듯 어떤 배역을 맡든 온몸 던져 연기하는 성실성이 빚어낸 결과다.
40대 이상에게는 오늘 내 직장과 가정과 가족에게 이미 닥쳤을지 모를 문제를 풀 열쇠를 재미있게 찾게 하고, 2030에게는 장차 닥칠 인생 숙제를 예습하게 하는 ‘관능의 법칙’. 수학 문제보다 천 배 쉽고, 물리 법칙보다 만 배 재미있는 어른들의 영화를 만나 보자. 중반까지 재미있다가 마무리 못 해 쩔쩔매는 드라마나 영화에 지친 당신이라면, 마침표까지 완성도 있게 찍는 영화로 해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