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영화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올랐다. 그것도 1위다. 개봉 첫 주 38만 명이 봤다, 2021년 개봉작 중 최고 성적이다. 9일째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무슨 역을 맡기든 크기와 성질에 구분 없이 완벽히 연기해온 배우 조우진의 첫 단독주연작 ‘발신제한’(감독 김창주, 제작 TPS컴퍼니·CJ ENM, 배급 CJ ENM)이 일궜다.
채널A ‘행복한 아침’의 장예인 MC는 지난 30일 한 주간의 영화 박스오피스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저도 봤는데, 숨 막히게 재미있다”고 호평했다. 딸과 아들을 태우고 출근하는 내 차에 폭탄을 장착한 범인과의 숨 막히는 대결, 되레 폭탄 테러의 범인으로 몰려 경찰의 추격을 받는 남자의 사투가 긴박한 카체이싱과 함께 펼쳐진 결과다.
그 중심에 두 아이의 아빠이자 실적 좋은 은행센터장 이성규 역할을 맡은 배우 조우진이 있다. 조우진은 영화에 박진감을 불어넣고 관객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유지하는 중책을 맡았고, 흠잡을 데 없이 해냈다.
부산시 해운대 일대를 배경으로 한 ‘발신제한’은 영화 초반, 범인의 말을 믿지 않고 차에서 내리려다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폭파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차에 타 있는 이성규 가족과 관객의 마음에 두려움을 안기고 출발한다. 파괴력 있는 시작임과 동시에 범인에 대한 저항을 꽁꽁 얼리는 장치기도 하다. 김창주 감독은 어설픈 탈출 시도로 차 일부가 날아가거나 성규의 신체 일부가 훼손되는 방식으로, 주인공에게 물리적 제한을 가하며 긴장감을 유발하거나 공포를 조성하지 않는다. 차에서 내릴 수도, 범인의 전화를 끊을 수도, 차를 멈출 수도 없는 상황만으로 밀고 나간다.
심플 하지만 그래서 더 강력한 설정은 조우진의 연기력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했고, 그것을 잘 아는 조우진은 운전석에서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도 육·해·공중전을 다 치르는 듯한 스릴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발신제한’의 주인공 조우진을 보는데 할리우드 영화 ‘마스크’(1994)의 짐 캐리가 생각났다. 짐 캐리가 맡은 은행원 스탠리는 고대 유물인 마스크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한다. 마스크를 얼굴에 쓰면 스탠리는 불사신이 된다. 스탠리는 평소 좋아하는 폭력조직 보스의 손아귀에 갇힌 티나를 구해내는 데 마스크의 힘을 쓰려한다. 에지 시(市)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경찰은 악당이 아니라 스탠리를 추적한다. 스탠리는 악당 보스에게 마스크를 빼앗기지만 마스크보다 힘 센 ‘사랑’으로 난관을 헤쳐 나간다.
‘마스크’는 코미디영화다. 코미디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주연배우는 정극 연기를 하는데 관객이 웃어야 하고, 비극이 함께 가야 한다. 만일 짐 캐리가 마스크를 쓰나 벗으나 코믹했다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스크 착장 전후의 캐릭터 차이를 확실히 연기했고, 나중에는 마스크를 벗어도 힘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변모했기에 관객이 박수를 보냈다.
‘마스크’의 짐 캐리에게 마스크가 1장 있다면, ‘발신제한’의 조우진에게는 적어도 4장의 마스크가 있다. 능수능란한 화법으로 고객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VIP 고객 전담 투자사, 잘나가는 만큼 후배에게 권위적이고 상사에게 당당한 은행센터장, 강-약-중간 약-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전화기 너머 협박범과 거래하는 협상가, 아내에겐 사무적이어도 자식들에게는 다정다감한 아빠.
이성규라는 인물이 상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것인데, 배우 조우진이 이를 변화무쌍하게 소화한 것인데, 여러 ‘모습’이 아니라 ‘마스크’라고 한 이유가 있다.
한 번 쓰면 얼굴에 딱 달라붙어 잘 떼어지지도 않는 마스크가 스탠리의 급격한 캐릭터 변화에 설득력을 부여했듯, 짐 캐리가 그 전후를 찰떡처럼 연기했듯, 조우진이 펼쳐낸 연기는 마치 ‘하나의 인격’이 된 마스크를 번갈아 쓰는 것처럼 각각의 성격이 확연히 구분되고 전혀 섞이지 않는다. 심지어 앞을 보고 운전하며 발신제한 번호로 전화를 건 협박범과 통화하다가 잠시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볼 때, 그 찰나의 순간에도 조우진의 표정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협상가 마스크를 벗고 아빠 마스크를 쓴 것처럼, 떼려 해도 맘대로 떼지지 않게 착 달라붙는 마스크를 얼른 벗고 다른 마스크를 쓰는 ‘신공’을 지닌 것처럼.
표정의 인위적 변화, 단계별 차등이 아니라 마치 다른 인격이 된 듯 다채로운 얼굴과 몸짓, 광폭의 스펙트럼을 감정 연기를 펼쳐냈기에 마스크, 그중에서도 짐 캐리가 썼던 변신 마스크를 연상한 것이다.
사실, ‘발신제한’은 영화의 연출부터 편집까지 전 과정을 담당한 김창주 감독의 얘기처럼 조우진의 얼굴로 시작해 얼굴로 끝나는 영화다. 김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포스터에 있는 조우진의 상기된 얼굴이 계속 나온다. 3개월에 달하는 기간 동안 조우진 배우가 그 감정 속에 살아준 것이다. 촬영이 끝나고도 여운이 남아 힘들어 했다”면서 “예상보다 훨씬 큰 에너지를 보여줬고, 함께 작업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행운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겸손한 우진 씨’는 밝힐 수 없는 마스크의 진실은 진심에 있었다. 촬영이 끝났음에도 영화 속 상황과 인물에게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배우 조우진의 모든 것을 부어 이성규를 표현한 것이다. 흉내가 아니라 이성규 자체가 되어 상황에 몰입하니, 마스크 신공을 지닌 것처럼 그렇게 시시각각 다른 감정이 얼굴로 드러났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숨막히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영화의 마지막엔 이성규가 모든 마스크를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시원한 한 방을 날린다. 끝까지 체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