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하 카페 없는 요즘 알고보니
유통·프랜차이즈 불러모아 전기절약 협약식
예행연습에 불과, 3~4년 뒤엔 전력부족 극심
유명 커피전문점 아메리카노 한 잔 값 4000~5000원. 커피 가격엔 커피값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엄연히 자릿세가 있다. 여름철엔 냉방비도 포함이다. 빵빵한 에어컨이 불볕더위에 땀이 범벅이 된 몸을 식혀줄 것이란 기대심리가 비싼 커피가격을 상쇄해왔다. 하지만 폭염이 기승을 부린 올여름 이같은 통념이 더이상 통하지 않음을 체감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8월 첫 주, 기자는 젊음의 거리 홍대를 방문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몇몇 주요 커피숍 매장 안으로 들어가봤지만 예년과 같은 불볕더위에 달궈진 몸을 식혀줄 소위 '에어컨 빵빵한' 카페는 찾기 힘들었다. 매장 안 에어컨 설정온도를 26℃ 이하로 설정한 곳은 단 한 곳도 찾지 못했다.
동교동 어느 프랜차이즈 카페 직영점에서 만난 이모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여름철엔 시원한 카페에 온몸이 서늘할 정도로 앉아있다가 귀가하는 게 묘미였는데 이젠 이러한 청량감을 느끼기 힘들다"며 "시원함과 청량감을 느끼기 힘들다면 더 이상 커피 한 잔에 4000~5000원 주고 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26℃ 이상 준수하자' 유통·프랜차이즈, 정부와 협약
카페뿐만 아니라 대형마트, 백화점, 쇼핑몰 등 거의 대부분 상업시설도 마찬가지다. 올여름 실내 온도가 예년에 비해 높게 느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 이유는 각 기업들이 적정온도를 준수하자는 협의를 정부와 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6월 28일 유통·프랜차이즈 가맹점 및 관련 협·단체, 유관기관 등을 불러 모아 '에너지절약을 위한 사회적 협약식'을 개최했다. 산업부는 "협약식은 국민 생활과 접점에 있는 기업들이 중심으로 적정 실내온도(하절기 26℃, 동절기 20℃) 준수 등 에너지절약을 적극 실천함으로써 탄소중립을 위한 실질적 이행에 동참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유통・프랜차이즈 측에서는 BGF리테일, GS리테일, 이마트24, 코리아세븐, 미니스톱, 씨스페이시스, 홈플러스, 롯데마트, 이마트, 롯데슈퍼, 이마트에브리데이, CJ CGV, 파리크라상, 하나은행(금융권) 등 14개 기업이 참여했다. 협·단체 측에서는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 한국편의점산업협회, 한국백화점협회, 한국체인스토어협회, 한국온라인쇼핑협회, 전국상인연합회, 한국슈퍼체인유통사업협동조합,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등 8개 기관이 참석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중대형 상업시설 매장이 동참한 셈이다.
이날 협약식에 참석한 한 대형마트 홍보팀 관계자는 "말이 협약식이지 정부로부터 생산, 유통, 판매 지원 및 감시를 받는 기업 입장에서 정부 지침을 반강제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며 "하절기 26℃라는 가이드라인에 맞춰 준수하도록 본사에서 각 매장으로 공문을 발송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당시 협약식에는 여성단체협의회, 기후환경네트워크와 같은 친정부 성향 시민단체도 참석했다"며 "사실상 정부를 대신해 각 기업들의 적정 실내온도 준수 여부에 대한 감시 목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국민 생활과 접점에 있는 기업들이 에너지 절약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는 취지이지만 "이 정도면 절약의 수준을 넘어 고통을 감내하라는 수준"이라는 국민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형평성 문제도 대두된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사업자가 운영하는 카페는 일일이 정부 규제를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가 방문한 마포구 합정동의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는 냉방기 온도를 18℃로 맞춰놨다. 해당 카페 운영자는 "정부로부터 내려온 지침은 별개로 없으며 에어컨 온도를 예년과 같이 시원하게 맞춰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은 올해는 더 강화된 기준인 '냉방기 순차 운휴'가 내려졌다. 954개 공공기관을 전국 6개 권역으로 나눠 7월 넷째 주부터 8월 둘째 주까지 최대 전력 사용 시간인 오후 2시~오후 5시에는 30분간 돌아가면서 냉방기를 끄거나 설정온도를 28℃에 맞춰야 한다. 그러나 28℃ 이상 유지 정책은 사실상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는 온도로 업무를 제대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지나친 전시행정이라는 지적이다.
"탈원전 정책 탓 아니다" vs "탈원전 부작용 예행연습"
올여름 정부가 유난히 전력소비의 고삐를 당기자 탈원전 정책 부작용이라는 주장과 탈원전 탓이 아니라는 주장이 충돌을 빚고 있다. 정부는 최근 '예비력 부족 사태, 이에 따른 전력 절약 강조'가 원전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일부 에너지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부작용 전조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탈원전 부작용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가 전력수요를 일부러 낮춰 잡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산업부가 작년 12월 발표한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하계전력수요가 연평균 0.9% 증가해 2034년 101.2GW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2015년 발표된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전력 수요가 가파르게 늘어나 2029년 111.9GW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 것과 대조된다.
정용훈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최근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 자가용 태양광 등으로 피크시간이 옮겨가는 일이 발생했는데 9차 전력수급계획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전력수요를 과소평가 했다"며 "당시 정부는 전력수요가 낮으니 원전을 증설할 필요는 없다는 식의 논리를 폈었다. 수요를 과소평가한 것은 분명한 정부 실책이며 탈원전 정책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전력수요를 낮게 예측해 발전소를 짓지 않은 여파는 5~10년 뒤 나타난다"며 "탈원전 4년차인 지금은 예행연습 수준으로 보면 되고 앞으로 3~4년 뒤 본격적으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어 "현재 계획예방정비로 서있는 원전 7기 중 3-4기만 가동해도 전력수급은 여유 있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