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억 과징금 사전 통지
"정상 범위 내 호가 제출"
손태승 판결 분위기 쇄신
시장조성자에 대한 과징금 예고에 업계가 당혹스런 표정이다. 시장조성자 역할을 적법하게 수행했을 뿐인데 금융당국의 통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업계에선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이 취임하자마자 '군기잡기'에 나섰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감원은 최근 시장질서 교란 혐의로 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 한화투자증권, 신영증권, 부국증권 등에 480억원의 과징금을 사전 통지했다.
금감원은 시장조성자로 참여한 이들 증권사가 호가 제출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주문 정정, 취소로 시세에 영향을 줬다고 판단했다. 금감원은 이들에게 자본시장법상 시세조종이나 시장질서 교란 등 불공정거래 혐의를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에셋증권· 한화투자증권 등은 80억원 이상을, 신한금융투자·한국투자증권·신영증권 등은 10억∼40억원대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금감원은 향후 자본시장조사심의위원회를 열어 제재 수위를 논의할 예정이다.
시장조성자 제도는 거래가 부진한 저유동성 종목 등의 매매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도입됐다. 시장조성자 역할을 수행하는 증권사들은 한국거래소와 계약을 맺고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 양방향에 적정한 신규 호가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거래 체결 가능성을 높인다.
증권사들은 정상적인 범위 내에서 호가 제출과 취소를 해왔다며 금감원이 지적한 시장교란 행위는 없었다고 항변한다. 정상적인 시장조성자의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설명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거래소와 계약한 의무 조건에 맞추기 위해 종목의 주문 가격을 지속적으로 정정·취소할 수 밖에 없다"며 "금감원이 해당 계약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징금 관련 사전통보를 줘 어리둥절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거래소가 작년 공매도를 통한 하락시세 조종 여부를 자체 검토한 결과 시세조종이 의심되는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다. 시장조성자 제도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 있는 만큼 거래소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거래소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사전 통보한 시장질서 교란 행위와 작년 시세조종 검사는 전혀 결이 다르다"면서도 "시장 조성을 하기 위해선 정정과 취소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당국이 시세에 부당한 영향을 준 부분을 어떻게 보고 적시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구체적인 진단은 어렵다"고 말했다.
금감원에 의중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업계에선 정은보 금감원장이 취임 초기 증권사를 상대로 기선제압에 나선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그간 금감원은 라임·옵티머스 사태 등으로 금융투자 업계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마침 최근 DLF 사태와 관련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대한 금감원 징계가 부당하다는 법원 1심 판결이 나오며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관측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감원의 이번 조치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증권가에서는 정 원장이 감독당국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증권사를 상대로 군기를 잡는 것 같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시장조성자 관련 점검은 정 원장 취임 이전에 진행된 만큼 군기를 잡으려는 의도는 전혀없다"며 "제재 결정 전까지 소명 기회가 많이 남아 있어 최대한 증권업계 입장을 들어 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증권사들은 자본시장조사심의위원회 전까지 최대한 입장을 소명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과징금이 만만치 않은 만큼 경우에 따라 집단 대응도 고심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 시장조성자 관계자는 "실제적으로 과징금이 부여되지 않은 만큼 공식적인 입장을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은 없다"면서도 "금액 자체가 부담스럽다며 대화를 계속할 방침"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