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이 불법으로 몬 것 사과하라"…이례적 경고
현 정권 범죄집단 규정에 수용 범위 넘었다 판단한 듯
靑 "사과하면 끝날 일"…文-尹 구도에 대선 영향 촉각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집권 시 전(前) 정권 적폐수사' 발언에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간 철저한 정치 중립을 강조하며 대선과 거리를 둬 왔던 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선 건, 윤 후보가 문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참모회의에서 전날 윤 후보의 언론 인터뷰 발언을 두고 "중앙지검장, 검찰총장 재직 때는 이 정부의 적폐를 있는데도 못 본척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없는 적폐를 기획사정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인가 대답해야 한다"며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수사의 대상, 불법으로 몬 것에 대해 강력한 분노를 표하며 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해당 메시지를 메모지에 직접 작성해 회의에서 참모들에게 전달했다. 참모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윤 후보의 인터뷰가 보도된 후부터 이날 오전 참모회의 때까지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오늘 대통령 말씀에 의하면 (윤 후보)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몰랐다고 한다. 저희도 따로 보고를 안 드렸고, 대통령께서도 인터뷰 내용을 잘 몰라서 특별한 말씀을 안하셨다"면서 "나중에 확인해 보니 본인으로서는 상당히 심각한 발언이다라고 판단하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문 대통령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제가 짐작건대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문 대통령이 스스로 세운 '정치적 중립' 기조를 깨고 직접 입장을 밝힌 건, 윤 후보의 발언이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권이 스스로를 '적폐 청산 정권'으로 규정해 왔고 과거 정부와는 달리 권력형 비리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윤 후보가 현 정권을 적폐 청산 대상으로 치부한 게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윤 후보에게 임명 당시 '살아있는 권력에 개의치 말고 엄정하게 비리를 척결해 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어느 정권보다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했다는 점 때문에도 분노를 금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부의 적폐를 있는 데도 못 본 척 했다는 말인가"라고 발언한 부분에 이러한 문 대통령의 인식이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청와대가 "본인이 검찰총장직을 던질 정도로 검찰 독립성을 지키겠다고 하신 분이 대통령도 되기 전에 검찰 수사를 하라 마라라고 하는 것은 자기 부정 아니냐. 자기가 그동안 외쳐왔던 것과 상충된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윤 후보의 발언이 문 대통령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관한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공교롭게도 문 대통령은 이날 공개된 세계 7대 통신사 및 연합뉴스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 "과거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중 탄핵 후폭풍과 퇴임 후의 비극적인 일을 겪고서도 우리 정치문화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치 윤 후보를 겨냥하는 듯한 발언으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윤 후보는 전날 유튜브 채널에서 "이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계승자라고 그러는데 저는 사기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의도했든 아니든 야당 유력 후보에 대한 강한 수위의 메시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대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사실상 대선 한복판에 뛰어든 모양새가 되면서 '이재명 대 윤석열' 구도가 '문재인 대 윤석열' 구도로 바뀌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문 대통령 지지층이 이재명 대선 후보에 결집하는 신호탄이 되기를 기대하며, 문 대통령 발언에 힘을 싣고 있다. 국민의힘은 "노골적인 선거 개입"이라고 비판하면서도 현직 대통령과 야당 유력 후보 간 대결 구도 형성에 반문·보수 지지층이 더욱 결집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모양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지위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가짜뉴스에 대한 해명으로 정당한 반론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며 "청와대는 여당 의원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선거 중립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최근에는 행정력 80∼90%를 오미크론 대응에 쏟아붓고 있다. 이번 발언을 선거개입이라고 하면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처럼 죽은 듯이 직무정지 상태로 있어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대통령의 질문에 답하고 사과하면 깨끗하게 끝날 일"이라며 "이런 사안으로 대통령을 선거판으로 불러낸 것에 정말 유감이다. 이런 게 일종의 정치 적폐이자 구태"라고 강조했다.
윤 후보가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비판 이후 "윤석열의 사전에 정치보복이라는 단어는 없다"며 수습에 나서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논란 자체는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윤 후보는 "문 대통령께서도 늘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 없는 사정을 강조했다"며 "저 역시도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해서는 늘 법과 원칙, 공정한 시스템에 의해서 처리돼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다"고 했다. 이어 "이는 제가 검찰 재직시나 정치를 시작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는 우리 문 대통령과 저와 똑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